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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역사의 봄, 고치 만들게마씸

열다섯 번째 전국인권활동가대회 후기

전국의 인권활동가들이 제주에 모였다. 2월 28일부터 2박3일 동안 진행된 제15회 전국 인권활동가대회. 2002년 1회를 시작으로 거의 매년 열린 대회가 드디어(?) 바다도 건넌 셈이다. “다음은 오키나와?” 활동가들이 주고받는 농담에는 제주가 선사하는 설렘이 묻어있었다. 낯선 풍광 속에서 일상으로부터 멀리 떠나왔다는 휴식의 느낌을 얻게 되는 곳, 그래서 인권활동가들과의 만남도 괜히 더 반갑고 애틋해지는 것. 그러나 제주도 누군가에게는 삶의 현장이고, 삶과 죽음이 켜켜이 쌓인 역사의 현장임을 잊을 수는 없었다. 이번 대회의 제목처럼 전국의 인권활동가들은 “제주4·3 70년, 인권으로 역사를 여행하”는 시간을 가졌다.

 

시작은 무성의했으나

 

“제주4·3 70년이기도 한데 제주 한 번 가볼까?” 시작은 이처럼 무성의했다. 준비모임이 꾸려지던 작년 가을에는 과연 가능한 기획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상상력만 키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평화기행을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제주에서 묵고 먹고 움직일 수 있게 되니 이제 제주 왕복에 드는 예산을 마련하면 될 듯했다. 인권재단사람과 4.9통일평화재단은 이번 대회의 취지에 크게 공감했다. 인권활동가들이 제주4·3을 만나러 가는데 왕복 교통비 때문에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며 인권활동가대회를 후원해주었다.

프로그램도 윤곽을 잡아갔다. 처음에는 핑계에 가까웠던 제주4·3을 기억하고 행동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4·3평화공원 방문과 역사기행, 제주4·3을 인권의 관점에서 되짚어보며 내일의 과제를 찾는 포럼도 준비했다. 프로그램 기획 논의를 할 때는 걱정도 들었다. 인권활동가대회에서 제주4·3에 관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게 너무 뜬금없다고 여겨지진 않을까. 인권과 제주4·3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너무 끼워맞추기로 보이지는 않을까. 대회가 시작되자 이런 걱정은 금세 무색해졌다.

첫날 열린 포럼은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질문과 의견이 쏟아졌다. 발표는 셋이었다. 제주4·3 과거청산을 국제기준에 비춰보며 과제를 제시(이재승,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하고, 여성의 경험을 통해 무엇이 침묵을 강요하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지 탐색(정원옥, 이내창열사 기념사업회)하며, 구술의 힘이 어떻게 사회적 기억을 만들어가는지 살펴보는(유해정,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내용이었다. 제주4·3을 현재진행형의 역사로 불러내며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진상규명을 둘러싼 권력관계와 이데올로기를 직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권운동의 여러 쟁점들과 이어지기도 했다.

포럼으로 생각의 거리들을 얻었다면, 둘째날 진행된 역사기행은 몸으로 제주4·3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모두 네 팀으로 나눠 기행을 하게 되었다. 휠체어로 충분히 이동 가능한 곳들로 구성된 코스가 있었고, 어둡고 좁고 낮은 동굴을 기어서 가야 하는 동광리 큰넓궤 코스도 있었다. 큰넓궤는 인근 마을 주민들이 군경의 학살을 피해 숨어 지내던 동굴이다. 화산지형인 제주에는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속은 깊은 용암동굴들이 꽤 있다. 마을 사람들만 아는 동굴에, 수개월씩 숨어 지내게 될 줄도 몰랐을 텐데, 그렇게 숨어 지내다가 결국 죽게 될 줄도 몰랐을 것이다. 제주 사람들이 살아내야 했던 4·3 이후의 시간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야만의 시간이었다.

인권운동의 역사를 만나다

 

제주4·3의 역사를 만나는 것과 더불어 인권운동의 역사도 함께 되짚어보기로 했다. 둘째날 오후에 열린 토론회는 90년대 이후 한국 인권운동의 역사를 통해 지금 인권운동의 과제를 찾아보려는 기획이었다. 정정훈(서교인문사회연구실)은 90년대 형성된 2세대 인권운동을 변혁운동과의 연속성/단절을 통해 규정하고 2세대 인권운동의 주요 흐름을 자유권/사회권/반차별로 나누어 짚어보면서, 3세대 인권운동을 위한 전략과 이론이 필요한 때라고 주장했다.

지정토론에 나선 정욜(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은 인권의 제도화와 혐오선동 세력의 조직화가 맞물려있는 현실에서 제도를 넘어서는 다양한 대항전략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채민(전북평화와인권연대)은 지역의 인권운동단체가 다양한 의제나 사건 대응을 모두 맡아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며 지역의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대, 지속가능한 운동을 위한 기반 마련에 대한 고민을 전했다. 나현필(국제민주연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혁신위 권고안을 받고 일정 부분 변화하려는 노력도 보이는 현 시점에서 인권운동은 어떤 목표를 설정하며 개입해야 할지 고민을 꺼냈다. 지정토론과 이어진 종합토론에서 오간 의견들을 들으며 모두들 자신의 이야기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발제와 토론에 앞서 류은숙(인권연구소 ‘창’)의 기조연설이 있었다. “인권활동가들에게 운동의 역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류은숙은 △나의 존재와 존재방식에 대해 묻게 된다, △놓쳤던 목소리를 재생하고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게 된다, △사건의 동시대성을 확보하고 연대책임과 참여를 북돋는다, △무용담과 무력감 사이에 갇힌 악에 대한 감수성을 변하게 한다는 의미를 짚어주었다. 인권운동의 역사뿐만 아니라, 제주 4·3을 만나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기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역사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밀어가는 주체가 될 수 있다. 끊임없는 질문이 사건을 재구성하고, 사건이 현재로 연결되는 만큼 세계를 지배하는 악은 더욱 투명하게 확인된다.

배움과 교류의 즐거움

 

이번 인권활동가대회는 ‘역사’라는 개념을 통해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준비되었다. 이와 같은 방식은 처음 도입되었는데 참가자들이나 기획단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다만 기행 프로그램에 배정된 시간이 많다 보니 인권활동가들이 자신의 관심사나 현안에 관해 여유 있게 이야기 나눌 시간이 부족했다. 둘째날 기행은 엄청난 강풍을 맞으며 진행해야 했는데 숙소로 돌아와 충분히 쉴 시간도 없이 토론을 시작하게 돼서 힘들기도 했다. 4·3 기행은 몸만 힘든 것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이번 인권활동가대회에는 제주 지역의 인권활동가 40여 명이 참석했다. 제주의 활동가조차도 “제주에 이렇게 인권활동가가 많은 줄 몰랐다”며 농담할 정도였으니 이것만으로도 풍성한 대회였다. 다음 인권활동가대회도 인권단체가 있는 지역을 돌아가며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각자의 활동이 있다 보니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교류는 쉽지 않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인권활동가대회가 진하게 인권활동가들이 만나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되도록 하는 것이 늘 과제다.

기대가 큰 만큼 아쉬움은 늘 남지만 저마다 소중한 기억과 배움을 얻어갈 수 있었던 인권활동가대회. 역사를 돌아보며 얻은 질문들을 활동 속에서 풀어낼 때 누군가 응원하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것이다. 다시 돌아올 1년 후의 대회 때, 우리가 주고받을 안부에는 더 속 깊은 이야기들이 많이 담길 것을 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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