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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사랑방 손님과 ○○씨

사랑방 손님과 ○○씨

안형진

“선생님이라는 표현이 좀 어색해서 그런데, 그냥 미류씨라고 불러 주세요,”

서면으로 실습을 신청한 후, 면담을 위해 사랑방에 처음 방문 한 날, 저에게는 많은 것이 낯설었습니다. 마치 가정집 같은 사무실도 낯설었고, 사무실에서 밥을 지어 먹는다는 것도 낯설었습니다(어쩌면 직접 방문하기 전까지는, 사랑방을 어떤 빌딩에 있는 회사정도로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집으로 돌아갈 때, 미류 활동가가 저에게 한 ‘부탁’은 단순히 ‘낯설은’ 정도를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처음 활동을 시작할 때는 ‘호칭’문제가 자꾸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으며 오히려 먼저 그 부분을 이야기해 준 미류씨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그것도 저의 실습일정을 관리하고 지도해주는 사람에게 제가 “○○씨”라고 부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신기하게도 며칠이 지나자 “○○씨”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입에 붙게 되었고, 그 ○○씨와 저 사이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꼈던 ‘나이’와 ‘신분’은 사라졌습니다. ○○씨와 저는 같은 목표와 이상을 가진 상임활동가와 자원활동가였으며, 이는 한명의 인간과 또 다른 인간과의 관계였습니다.

저는 인간과 인간의 ‘평등한 관계’야말로 인권운동의 가장 중요한 전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나’와 ‘타인’의 관계가 만약 현실세계의 수많은 조건들에 의해서만 결정되어버린다면, 그러한 관계 속에서는 ‘인간 그 자체’는 결코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나와 타인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선배와 후배, 연장자와 연소자, 종업원과 손님, 고용주와 노동자, 선생과 학생, 남성과 여성, 한국인과 비(非)한국인의 관계이기에 앞서 한명의 인간과 또 한명의 인간의 관계여야 한다고. 오직 이러한 조건에서만 ‘내가 존중받고 싶은 만큼 남을 존중하는 것’이 가능해 지며, ‘나의 해방이 곧 타인의 해방이자, 타인의 해방이 곧 나의 해방이 되는 것’이 가능해 질 것이라고.

올해로 인간이 된지 스물일곱 해가 된 저는, ‘민주주의’를 가장 반민주적인 방식으로 가르치시는 선생님을 보았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수업시간에 모자를 쓰고 있는 학생에게 호통을 치는 노(老)교수를 보았습니다.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해 탄식하면서, 후배들이 먼저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회학도를 보았고, 학교 옥상에서 음료수를 먹고 있는 나에게, 분리수거를 꼭 좀 부탁한다고 조심스럽게 경어로 부탁하던 나이 많은 청소 노동자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관계들이 모순되고 불평등하다고 느끼면서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개인적인 불이익이 두려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저는 현실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마치 진보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귀한 생각과 이상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권’은 저의 머릿속에서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의 일상의 영역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것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부끄러움과 불편함의 감정마저 옅어지는 것 같아 초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미류 활동가의 호칭에 대한 부탁이 자꾸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던 까닭은, 인간과 인간의 불평등한 관계(그토록 머릿속으로 경멸했던)를 그동안의 제가, 저의 일상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평등한 관계’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이야기하고, 사회운동을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간혹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강조했던 이 질문은 사실 내 스스로에게 되물어야만 했던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살면서 전태일을 3번 만났습니다. 조영래의 소개로. 처음 그를 만났을 때에는 분노했었고, 두 번째 만났을 때는 감탄했으며,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부끄러웠습니다. 그와의 마지막 만남 이후 ‘인권운동가가 되자’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저는 ‘세련된’ 사회이론을 접하는 것에 급급했고, 숫자와 도형으로 이루어진 종이 조각들을 보면 인권의 현실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토록 닮고 싶었던 ‘전태일의 삶’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저에게서 멀어져갔습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던 사랑방 활동은, 오랫동안 제가 갖고 있었던 불편함과 혼란의 감정을 그야말로 ‘끄집어내어 바라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못해 아쉽지만, 앞으로 더 많은 인권 주체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과 저의 삶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일상과의 타협에 대해서 더욱 부끄러워하고 싶습니다.

겨울이 이제 절정으로 치닫네요. 저는 동계학기가 끝나는 다음 주 주말에 전태일을 다시 한번 만나볼 생각입니다. 아, 새해 인사가 늦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2년이 ‘모든 사람들의 인권’이 충만한 해가 되길 기원해 봅니다.

아, 사랑방 식구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네요. ‘대구탕’ 맛있게 드셔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지금에 와서야 고백하는 것이지만, 12월 19일 저녁의 ‘대구탕’은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본 ‘조리’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솔직히 전 좀 짰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것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어요.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