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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복귀'의 변, 하나] 연구소 2년을 돌아보며

지난 2년간 인권운동연구소의 제1기 상임연구원으로 활동했던 배경내입니다. 연구소 졸업논문 작성을 끝으로 연구소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이제 2월부터는 <인권하루소식>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논문 작성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투여하다 보니 지난 2년을 평가할 만한 힘과 여유를 아직 갖지 못했지만, 짧게나마 사랑방 식구들께 소회를 밝혀봅니다.

제가 사랑방에 들어온 지도 햇수로는 벌써 6년째가 되었네요. 인권에 대해 막연한 확신만을 갖고 처음 사랑방에 들어왔던 제가 활동을 하면서 서준식 선생님을 비롯하여 선배 활동가들을 통해 배웠던 소중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요구하고 헌신하고 있는 인권의 보편성이라는 원칙이 과연 현 체제 내에서 실현 가능한 것인가라는 고민이었습니다. 지금 당장의 인권 현안들을 헤쳐나가는 것과 동시에, 만약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인권의 보편성이 실현될 수 없다면 이 체제를 넘어서기 위해 인권운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접하면서 저는 저의 얕은 문제의식이 부끄럽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방의 활동 구조 속에서 그러한 고민을 풀어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기간 답답한 문제의식만 안고 지내오다 사랑방 식구들은 마침내 큰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인권운동연구소의 설립'이었지요. 언제나 해야 할 일은 넘쳐나지만, 일단 연구소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고민을 집중적으로 풀어나가지 않는다면 늘 우린 같은 식으로만 운동을 계속해야 할 거라는 생각으로 무리한 결정을 내린 거죠.
그렇게 2001년부터 인권운동연구소가 활동을 시작했고, 저는 박래군 선배와 함께 연구소 제1기 상임연구원으로서 2년동안 공부를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늘 활동에 쫓기기 마련인 활동가에게 그런 시간이 허락된다는 건 드문 일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은 했습니다. 하지만 시작할 때는 그렇게 길게 느껴지던 2년이라는 시간이 살다보니 왜 그리 빨리 지나가던지요. 아직 무르익지 못한 고민들과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로 부끄러운 상황에서 허락된 시간이 끝나버리니 아쉬움만이 가득합니다. 연구소에서 공부한 성과를 지금 당장 직접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동료 활동가들이나 주위 분들을 피해 숨고 싶은 마음도 들구요. 제 개인적으로는 정말 소중한 시간들이었지만, 연구소의 설립 취지였던 '진보적 인권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내가 과연 답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면 여전히 자신이 없기 때문이지요.

연구소에서 한 공부들은 지금 당장 인권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 역량을 키우거나 활동가로서 이론적 힘을 키울 수 있는 공부는 아니었습니다. 연구소의 설립 취지는 지금 당장의 정책적·이론적 역량을 키우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소 큰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인권이라는 개념과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가를 근본에서부터 따져보는 데 있었으니까요.
아직도 저나 연구소는 '이것이 바로 진보적 인권운동이다'라고 뚜렷이 제시할 수는 없는 미흡한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마그나카르타'에서부터 시작하여 최근인 1990년 유엔에서 채택된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에 관한 협약'에 이르는 인권문헌들과 근·현대 자본주의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인권의 보편성은 근대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원리로서 자리잡았으면서도 늘 형식화된 채 체제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수행해 왔다는 점, 그리고 자본주의체제는 한 나라 수준에서나 지구적 수준에서나 '소수자의 배제와 불평등'을 통해 유지되어 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새로운 진보의 개념을 일구어낼 수 있는 다양한 상상력과 새로운 실험들이 그 역사와 함께 성장해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법과 국가의 기능에 대한 진보적 해석, '권력과 소유의 보편화를 통해 모든 이들의 모든 권리를 실현'하고자 했던 실험들, 사회주의 사상과 실험들을 통해 발전해 왔던 '참된 자유와 평등'을 위한 고민들을 접하면서 우리 인권운동이 체제에 안주하는 자족적인 운동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깨달음도 얻었습니다.

지금 제 앞에는 지난 2년간 연구소 생활을 통해 들었던 고민들이 담긴 한 편의 논문이 놓여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아동 인권'의 관계를 추적해 보면서 진보적 인권운동론의 단초라도 제공해 보려는 것이 이 논문을 쓴 동기였습니다. 다음달 8일에는 이 논문과 객원연구원으로 함께 활동해 오신 문만식 씨의 논문이 가진 문제의식을 동료 활동가들을 비롯하여 여러분들 앞에 내놓게 될 예정입니다. 무르익지 않은 고민이어서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기는 하지만, 진보적 인권운동론에 대한 고민을 좀더 발전시킬 수 있는 자리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지난 2년간 연구소의 운영과 성과에 대한 평가가 아직 공식적으로 정리되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미흡하지만 의미있는 출발을 이루어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권문헌연구>나 <사회주의 인권론>, <현대진보인권이론> 등의 세미나들은 국내 어느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의미있는 세미나라고 자부합니다. 물론 자료를 구하는 것조차 힘들 만큼 세미나를 알차게 진행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관련 전문가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도움을 구할 곳도 마땅치 않은 세미나였습니다. 그만큼 많이 헤매기도 했지요. 하지만 구하기 힘든 자료들을 발로 뛰면서 구해 놓았고, 시행착오를 거쳐 좀더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만들어내는 기초 작업이라도 해 놓았으니, 다음 상임연구원들은 더 발전된 고민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저를 비롯한 1기 연구원들이 이루어놓은 성과보다 더 큰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2년간 연구원으로 활동하시게 될 류은숙, 이창조 선배가 더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지켜봐 주시고 함께 고민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