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소위 말하는 ‘운동권’도 아니었고, 그 외에도 별달리 관련지을 것이라고는 조선일보가 아닌 한겨레를 읽고 있다는, 뭐 그 정도뿐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인권 운동’이 뭔지 제대로 알리가 없었지요. 하지만 그래도 ‘(‘사랑방’의) 사랑’은 조금이나마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문턱 없는 사랑방으로 힘겹게 발을 들이밀었습니다.
‘인권’이 뭔지 알아야 인권운동을 하겠구나 싶어서 ‘인권 교육실’이라는 곳에 참여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교육의 혜택으로 과도하게 발달한 수동적 이성의 힘으로, 저는 ‘인권 교육’을 듬~뿍 받고 싶다고 교육실 활동가에게 말했습니다. 자원활동가에게 인권 교육을 상시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씩씩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단지 ‘사랑’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고민이 커질 무렵.
한 통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11회 인권영화제 기획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화였습니다. 10년이 넘게 이어져 온 인권영화제를 사랑방에 와서 처음으로 알았을 정도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영화를 좋아한다는 개인적인 취향을 핑계 삼아 급기야 영화제 자원활동가로 변신했습니다. 영화제에서 주로 기술적인 부분에 관여하게 되면서 ‘기술 없는 기술팀’을 이루었습니다. 그로 인해 크고 작은 상영 사고가 일어나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영화제 이틀째에 1회 상영 예정이었던 <이야기해 봅시다>를 보지 못했던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현재까지 대략 6개월, 주로 영화제 활동을 하면서 가끔씩 사랑방 일정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면서 난생 처음으로 점거 파업 현장에 가보기도 했습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많이 들었고, 공분을 느끼기도 했습니다만, 제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일들이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방황하던 와중에 이렇게 ‘자원활동가의 편지’를 써보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냥 오~케이 한다면 무책임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당신만 아직 한 번도 안 썼다.’는 말이 저를 향해 강하게 돌진하는 바람에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두서없고, 내용도 없는 편지가 탄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