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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상임활동가의 편지 - 두울] 정치성과 비정치성 사이에서

지난 11월 20일부터 열렸던 암스텔담 다큐멘터리영화제에 다녀왔습니다. 비와 바람이 오락가락 하는 암스텔담에서 올해도 분주히 치러진 이 영화제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다큐멘터리영화제입니다. 연 인원 30만 정도가 다녀가는 영화제이지만 도시 전체적으로 ‘국제 영화제’가 치러진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습니다. 자전거들의 바쁜 움직임과 사방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가 오히려 이 도시를 휙휙 가로지르는 가장 큰 느낌이었습니다.
올해는 모두 240편의 기록영화를 2주간 쉼없이 상영했고 저도 그 중 50여편을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관람했습니다. 이번 영화제의 특별주제는 ‘미국의 오늘’입니다. ‘미국의 침략전쟁’과 ‘세계 자본주의의 강화’가 더욱 극성을 떨고 있는 이 시대를 반영하는 수많은 다큐멘터리들이 제작되고 있고 영화제측은 이같은 ‘대세’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관람했던 50여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 <아나의 아이들 Arna's Children>입니다. 유태인으로 태어난 여성 아나는 1950년 아랍청년과 결혼합니다.
평생을 좌파활동가로서 이스라엘의 폭력에 맞서 살아온 그녀는 웨스트 뱅크의 쥬닌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점령과 파괴에 대항하기 위한 운동 중 하나로 <연극학교>를 만듭니다. 절망과 분노에 빠져있는 아이들에게 연극을 통해 아픔을 극복하고 저항정신을 키우는 것이 그녀의 교육입니다. 아들 줄리아노와 함께 ‘저항의 놀이’로 이 지역 아이들을 키웠던 아나는 96년 암으로 사망하고 쥬닌에는 더욱 폭력적인 이스라엘의 침공이 이어집니다. 연극학교도 문을 닫고 맙니다. 이 작품은 아들 줄리아노가 89년부터 찍어둔 아이들 공연 필름과 함께 2001년 쥬닌으로 가 그 때 연극학교 아이들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것이며 줄리아노가 감독입니다. 영화는 해피앤딩이 아닙니다. ‘아나의 아이들’은 대부분 저항군으로 싸우다 죽고 세상에 없고 그 중 한 명은 자살폭탄으로 자신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한 청년마저 줄리아노가 촬영하던 도중 이스라엘의 총에 맞아 죽고 맙니다. 아나의 아이들은 아무도 살아 남지 않은 것입니다.

장편부문 경쟁작이었던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치켜 올린 작품이지만 수상하지는 못했습니다. 대상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검문소를 다루고 있는 <체크 포인트>가 차지했는데 영화제 참여자들은 이를 두고 정말 말들이 많았습니다. 수십 곳의 검문소를 돌면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하는 행태들을 기록한 <체크 포인트>는 결코 ‘나쁜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저 군인들 정말 왜 저러는 거야!”라는 화가 치밀게 만들지만 결코 ‘정치적인 접근’은 피하고(안하고) 있는 순진한 영화였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의 주제의식이 ‘정치적인 판단’이 빠져 있다면 결코 ‘좋은 다큐멘터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영화제측의 ‘정치적인 판단’에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이스라엘의 파워를 실감케 했습니다. <체크 포인트>도 이스라엘필름파운데이션에서 제작지원한 작품이었고 수십편의 작품이 이스라엘 정부 기관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영화제 전부터 이른바 ‘이스라엘 영화’를 적극 홍보해왔고 급기야 대상까지 거머쥔 것입니다. 유럽에서 다큐멘터리 산업은 ‘돈의 규모’나 ‘문화적인 영향력’ 모두 무시 못할 대상이고 이 영화제는 그러한 ‘산업적 거래’를 성사시키는 가장 큰 장터 노릇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영화제에 대한 방송과 제작사들 공략은 제가 느끼는 것 이상 치열할 것입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팔-이 분쟁을 다루는 수많은 영화가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의 국익’은 ‘이런 영화’들로 인해 상승하는 것입니다.

이번 영화제의 두 번째 베스트를 말하라면 <나의 살 나의 피 My Flesh and Blood>를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수잔이라는 미국 여성은 일정한 수입도 없고 뚜렷한 지원도 없이 9명의 장애아들을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몸이 짓무르는 병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 화상으로 팔이 없고 얼굴이 심하게 망가진 아이, 다리가 없는 아이, 그리고 고질적 심장질환과 성격장애까지 가지고 있는 사내아이. 이들이 풍요롭지 못한 가정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이란 말과 거리가 멉니다.
수잔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이들은 매우 행복합니다. 수잔의 가장 훌륭한 점은 장애아들의 장애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모두 평등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며 그래서 아이들은 때때로 행복한 것입니다. 성격 장애를 가지고 있는 조는 장애아들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차별과 천대를 집에서도 고스란히 경험하게 해주는 ‘세상의 거울’ 같은 존재입니다. 영화는 몸의 장애와 정신의 장애, 그리고 그 사이에서 매일 매일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과 수잔을 카메라에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게 태어났다’는 사상누각에 불과한 말을 영화는 그야말로 ‘짠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공룡적 자기증식으로 무한질주하고 있는 ‘기업'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기업 Corporation>도 내년 인권영화제에서 관객들과 함께 보고 싶은 작품이었습니다. 자본의 세계화를 주도하고 있는 전세계 거대 기업들의 전?현직 CEO와 기업 분석가 그리고 자본주의의 무한경쟁과 질주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노암 촘스키 같은 학자들이 고루 출연해 ‘기업’의 목적이 과연 무엇이며 무한 질주의 결과 어떠한 참극이 벌어지는지 다각도로 설명해 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처럼 심화되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의 반인권성을 풍부한 내용과 다양한 형식으로 지적하고 있는 여러 편의 작품이 상영되었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세계 민중들의 삶에 대해 ‘현실 기록’의 임무가 주어진 다큐멘터리스트들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주의 붕괴 이후 사회적으로 일대 혼란을 겪고 있는 동유럽 국가에게 ‘자본주의 비판’은 그리 명쾌한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소련에서 독립한 나라 조지아의 전력 상황을 담은 <파워 트립 Power Trip>의 상영은 동구권의 복잡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 한 예입니다. 미국의 다국적 전력회사 AES는 조지아의 독립 이후 수도 투빌리시의 전력 공급권을 사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업으로 인해 경제 위기에 빠져 있는 투빌리시에서는 전기요금을 제대로 낼 수 있는 사정이 아니었고 AES는 수많은 가구에 단전 조치를 취하곤 했습니다. 전기 없이 살 수 없는 주민들은(민영화 이후 전기요금이 턱없이 비싸기도 했고) 회사 몰래 전력을 다시 연결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그러다 전기 사고로 사망하기도 합니다. 겨울엔 사정이 더 좋지 않아서 요금을 내더라도 전기공급이 제한적이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서 AES는 제대로 이윤을 보지 못했습니다.

작품은 AES의 조지아 자회사인 텔시아의 한 직원을 중심으로 ‘조지아의 혼란’을 잡아내고 있습니다. 영국 출신의 이 직원은 주민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회사의 정책을 움직여 보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조지아 정부의 무능력’ ‘항의군중에 대한 무정부적인 묘사’를 적절히 섞어 넣고 있었습니다. 상영이 끝나고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감독이 인사말을 마치자 마자 갑자기 한 여성이 일어나서 “당신이 만든 건 AES 선전영화다” “지금 조지아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느냐”고 힐난한 뒤 이건 “CIA가 원하는 바”라고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여기 저기서 “조용히 해”라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감독이 회사냐 왜 그걸 감독한테 따지냐”고 이 여성에 대한 반박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이 여성도 지지않고 “이 영화제도 프로파간다 영화제다”라고 응수했습니다. 그때 한 여성이 일어나더니 “내가 그곳 출신이다. 나는 이 영화에 최고의 점수를 주고 싶다”며 관객투표 용지함에 자신의 투표용지를 넣는 행동까지 취했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해석해야 하나, 영화제 내내 고민이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인 감독은 우연히 조지아에 갔다가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되었고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카메라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에 따라 그 작품을 판단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우친 예였습니다. <파워 트립>의 카메라는 AES의 편에서 주민과 조지아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고통받는 주민의 위치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채록했지만 그 입장에서 그 고통을 재현해 내지 못한 것입니다. 암스텔담에서의 2주 동안은 카메라의 위대함에 때로는 감동하면서도 이 같은 영화들로 인해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 절절히 느끼는 시간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