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내 / 인권하루소식 편집장
설문지를 만들기 위해 지난 1년간의 하루소식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여러 가지 가슴 아픈 사연들, 기가 막힌 사건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다 보니 어느새 주요 사건 59개 문항이 추려졌다. 언젠가 한 독자가 <인권하루소식>을 읽는 일은 참으로 힘들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딱딱한 기사체에 대한 비판인가 싶었더니, 그 안에 담긴 사연들이 너무나 자신을 힘들 게 한다는 고백이었다. 59개 문항들 가운데 좋은 소식, 인권의 진전을 알리는 소중한 소식이 가물에 콩 나듯 띄엄띄엄 박혀있는 것을 보니 새삼스레 그 독자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서 박혔다.
올해는 기성 정치권 내에 가장 개혁적이라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첫 해였다. 누구는 그가 ‘인권변호사’ 출신이라는 이유로 많은 기대를 했다고 한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새 정부의 상대적 개혁성이 인권의 진전에 어느 정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인권운동 진영에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 뽑힌 10대 인권소식이나 59개 주요 사건들의 문항을 보고 있노라면 노무현 정부 1년의 인권 성적표는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올해의 10대 인권소식으로 선정된 사건들은 2003년의 인권현실을 고스란히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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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이스 반대투쟁, 정보인권 수호 대장정 닻 올라(85.6%)
2. 미 이라크 대량학살전 개시…한국군, 침략군 일원 자처(83.5%)
3. 반핵 깃발 아래 하나된 부안, 정부 밀실행정에 경종(80.4%)
4. 송두율 37년만의 귀국, 유린당한 양심(78.4%)
5. ‘2003년 전태일들’, 몸뚱아리 내던져 노동탄압에 항거(74.2%)
6. 터널 속 이주노동자…강제추방에 ‘노예노동제’마저 유지(55.7%)
7. 농민 이경해 씨의 죽음, 자본의 탐욕을 찌르다(48.5%)
8. 국정원이 쏘아올린 감시위성, 테러방지법 재추진(47.4%)
8. 잇단 생계형 자살, 빈곤이 부른 손짓(47.4%)
10. 집시법 개악 위기…‘집회금지법’ 비난 확산(42.3%)
그 외 10대 소식에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두산중공업 배달호 씨 분신사건을 비롯해 △아직도 폐지되지 않고 있는 사회보호법 △집회 현장이나 파업 현장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경찰폭력문제 △백혈병 환자들을 사지로 내모는 글리벡 약값 결정 △이어진 장애인 추락 참사 △국회 통과를 코앞에 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 등은 인권운동가들과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헌법재판소의 “대사관 1백미터 내 집회 전면 금지 위헌” 결정으로 집회의 성역을 다시 되찾은 일 △법무부가 호주제 폐지 민법개정안을 입법예고한 일 △법원이 안기부 조작으로 간첩누명을 쓴 고 김옥분 씨(수지김) 가족에게 국가배상을 명하고 국정원장이 가족들에게 사죄한 일 △정부가 제주 4?3항쟁과 관련해 제주도민에게 국가범죄에 대해 공식 사죄한 일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면 위안이 될까.
이러한 참담한 상황에도 시장의 권력과 그 권력의 유지를 위한 억압적 질서를 ‘나라경제’니 ‘국익’이니 ‘공공의 안전’이니 하며 기꺼이 옹호하고 있는 대통령은 지난 10일 세계 인권의 날 기념식장에서 침묵의 항의시위를 벌였던 인권활동가들에 이렇게 말했다.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가자.” 아무런 실천도 뒤따르지 않는 대통령에게서 우리가 신뢰를 계속 가져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어찌 보면 몇십 억, 몇백 억씩 자본에 손벌려 창출한 이 정권에 당초 기대를 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었을지 모른다. 결국 인권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는 우리들의 믿음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