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활동을 하자고 결심하게 된 것은 학년이 올라 얼마 남지 않은 졸업이 내게 제대로 압력을 가해 오는 것을 느꼈을 쯤이었다. 대학에서는 다들 전망, 전망하며 전망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고 다녔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학 이후에도 불타오르는 변혁의 의지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전과는 크게 다른 삶의 조건, 삶의 형태가 필요하며 다들 그에 대해 불안을 안고 고민하고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다이내믹한 질문이 가장 낯설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는 영락없는 대학 4학년인 듯 하다. 대학이라는 쏜살같은 사계절의 공간과 대학생이라는 특수한 조건과의 결별의 시간은 임박해 있었다. 이제는 장기전이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변혁 의지’를 삶 속에서 풀어내고 있는 선구자들의 생태를 조사해 보아야겠다는 욕구를 강하게 가지게 된 것이었다.
사랑방의 문을 두드린 것은 이를테면 이러한 불순한 의도(?)을 실현하려는 일종의 ‘벤치마킹’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나는 목적 달성을 위해 제일 오래 있어야 한다고 하는 인권하루소식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나는 학교 수업을 화, 목, 금요일에 몰아넣고, 월요일과 수요일 아침 하루소식 기자로서 사랑방에 출근하게 되었다.
다른 곳에서 일하는 한 선배는 기사 쓰기는 언제나 괴로움의 과정이었다고 고백했는데, 과연 기사를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대학에서 얼치기 언론인의 명함을 가지고 있던 나는 적지 않게 부끄러워 졌다. 객관적인 사실만을 가지고 완전하게 깎여진 문장으로 짧게 쓰는 것. 이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이었던가. 그에 더해 부당함을 호소하는 열정과 같은 것도 은연중 담아내야 한다. 이리하여 나는 번번이 기사 잘 쓰기에 실패하고 남들이 뒷풀이 갈 때 술 마시러 가지도 못했다.
그런 나는 스스로 힘들다거나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그런 류의 생각을 시도해 본 적도 없다. 아직 날이 짧아 사랑방에 대해 무어라 운운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심스럽지만, 하루 하루의 기사는 나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랑방에 충만해 있는 어떤 기운의 결과물이다. 말하자면 사랑방에 넘쳐나는 일종의 ‘사랑방 아우라’가 나에게 기사를 쓰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아우라는 사람들을 대체로 이러한 상태로 만든다. 매사에 진지하고, 호의적이며, 부지런하고, 쾌활하며, 긍정적이고, 유머러스하고 유쾌한 상태로. 이 결과 사람들은 많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잃거나 정신적인 평형을 잃는 일이 별로 없다. 이는 대학에서 구경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랑방의 작업환경에 덧붙여 두 끼의 식사가 제때 나오고 때때로 간식도 나오니 즐거이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랑방에 출입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비하면 기사 쓰기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마저도 스스로에 대한 투쟁의 고통이라고 한다면 사실 불평 불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하여 나는 기사를 한편 한편 쓸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인권하루소식에 한 몸 보탤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하다고.
즉 나는 사랑방에 고맙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인권하루소식 팀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때로는 묘한 느낌에 빠지기도 한다. 이른 새벽 놀다가 집에 들어갈 때, 혹은 잠들기 전 근처의 절에서 종소리가 들려올 때 문득 아직도 사랑방에서 편집의 과업을 진행하고 있을 하루소식 팀이 생각나는 것이다. 그것은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그리고 내게 내일의 행동을 촉구해 마다하지 않는 묘한 느낌이다. 주 2회의 사랑방 활동은 내게 하나의 마약과 같은 존재로 지금 기능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