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AIDS 감염인 인권주간 평가회의를 하고 뼈해장국에 술 한 잔 기울이는데 전화가 왔어요. 자원활동가의 편지 마감 시한을 알리는 전화. 으앗 이런. 사실 잊고 있었어요. 분명 어느 날엔가 저녁을 먹으면서 부탁을 받고 승낙했던 것 같은데, 밥을 먹으면서 한 이야기는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고 있기 때문인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전 아주 철저하지도 성실하지도 못한 사람이에요. 이렇게 맡아놓은 일도 깜박하고요. 때로 소심하고 자신감 없고 언변도 글발도 인권에 대한 감수성도 그저 그래요. 그러니까 그냥... 보통사람인거죠. 그런데 사랑방이 참으로 좋은 것은 그런 사람에게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일정한 역할이 주어진다는 것이고, 어떤 방침을 가지고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 같아요. 상대방을 신뢰하고 상대방의 관점과 가치관을 존중한다는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권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게 서로 돕고 또 서로 자력화하고 있다는 게 8개월간 사랑방에서 활동하며 받은 느낌이랍니다.
사랑방 활동 이전에는 학교 안에서 학회나 학생회를 통해 조금 활동을 했었고 때로 학교 밖의 세상과 만나도 저의 정체성은 학생이었어요. 학생이기에 어설프고 미숙하다고 생각했고 때론 안전하다고 용서된다고도 생각하였죠. 사람들이 저를, 제가 저를 그렇게 생각하였어요.
사랑방 안에서 제가 학생인가 아닌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더군요. 학생이라고 여기지 않기에 더 엄격해지고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그런 냉정한 곳이 아니라, 상대의 역량을 믿어줌과 동시에 서투름과 부족함까지도 누구나 갖는 본질로 받아들여지는 곳.
그런데 사랑방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저는 어찌된 일인지 사랑방에서 한동안 위축되어 있었고 자신이 없었어요. 제가 속해왔던 곳 중에 가장 자유롭고 평등한 공간이면서 때로는 가장 저답기 어려운 부자연스러운 공간이기도 했어요. 분명 사랑방에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껏 사랑방을 늘 좋아하고 아끼고 있었는데 말이죠.
최근에 사랑방 자원활동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뭐랄까 연대활동이란 걸 했어요. HIV/AIDS 감염인 인권주간 준비단에 함께 했는데 처음 만나는 다른 단체 활동가들과 회의를 하고 캠페인과 기자회견 등 일정을 소화해내는 과정 속에서 저는 기존에 제가 활동가들 사이에서 느끼던 위축감을 조금은 덜어버릴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인권운동을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은 것도, 창조적 아이디어가 부족한 것도, 실무 능력이 떨어져도 글쎄 그냥 다 괜찮은 것 같았어요. 다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했더니 어찌저찌 돌아가더라는 것이지요.
그 공간이 꼭 사랑방보다 유난히 더 동등하고 저를 주체적으로 인정해줘서라기보다는 그냥 시간이 좀 흘렀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아니면 제가 너무 오랫동안 내재화해온 ‘뭔가 뛰어나야만 좋을 것 같은’ ‘잘하지 못하면 부끄러워지는’ 그런 강박관념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왠지 이제는 사랑방에서도 조금 덜 위축되고 더 자연스럽게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애정을 고백하는 편지라면 쉽게 잘 쓸 수 있는데, 이 자원 활동가의 편지란 건 왜 이렇게 재미없게 써지는 걸까요. 차라리 사랑방 사람들에 대한 애정표현으로 편지를 채울 걸 하는 후회가 살짝 들지만 돌이키기엔 마감 시한을 이미 넘겨버렸어요. 사실 이젠 어떻게 하면 이 편지를 좀 잘 써서 사랑방 사람들에게 안 부끄럽게 보일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서 해방되려구요.
그냥 맺으려니 섭섭해서 아는 사람은 아는 요즘 개그계의 유행어를 인용해 사랑방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며 맺고자 해요.
난... 사랑방 사람들 너무 좋아할 뿐이고.
사랑방 사람들이 해주는 맛난 밥 계속 먹고 싶을 뿐이고.
이번 겨울 지나면 자주 못 볼 것 같고. 그래서 아쉽고.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고!!^^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