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에 있었던 인권활동가대회 첫날, 배정받은 숙소에서 교육센터<들> 사람들과 몸으로 하는 '자석놀이'를 했다. 서로 각자의 N극, S극에 해당하는 사람을 알아맞히는 게임. 처음 만난 이들과 어색한 몸동작과 눈짓을 교환하며 좁은 방안을 뱅뱅돌고 있자니, 쑥스러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난 청소년 때에도, 대학교 새터 때도 그런 즐거운 놀이를 해본 기억이 없다.
오후 프로그램을 기다리는 사이, 대구에서 올라온 한 활동가와 쇼파에 나란히 앉아 인사를 나누었다. 4~5년쯤 전, 노학연대 사업 차 대구에 내려갔을 때 잠깐 본 적이 있어 어슴푸레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사랑방에서 활동한다는 말을 듣고 그는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그 날 밤, 뒤풀이 자리에서 사람들이 기타반주에 맞춰 부르는 민중가요는 무척 오랜만이었다. 탁자 건너편에 앉아 노래를 들으면서, 예전의 비슷한 장면들을 떠올렸다. 밤새워 토론하고 술마시는 ‘동지’들이 훨씬 많았고, 그래서 어디에 나서든 거리낌이 없었던 그때가 별로 그립지는 않았다. 그들과 함께 한 운동은 세상으로부터 어느정도 고립되어 있었고, 나는 지금보다 덜 현실적이었다.
다음 날,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활동가대회에서 처음 만난 이들의 이름과 소속을 적어봤다. 익숙하고 낡은 관계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무언가로 다시 엮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작년 2008년 한해를 사이에 두고, 그 전후로 몇 가지가 변했다. 운동에 대한 고민이 정신의 긴장과 함께 머릿속에서 쑥 빠져나갔다. 작년 6월에는 촛불집회에 시민으로 참가했다. 이전에 같이 활동했지만 언제부턴가 소식을 알 수 없었던 활동가 몇몇을 청계광장에서 우연히 마주쳤지만 인사는 하지 않았다. 기자들 꽁무니를 따라 프레스센터 꼭대기에 올라가 계단에 난 작은 창사이로 내려다본 노란 불빛의 행렬에 놀라고 나선, 노란 점이 되어 거리를 걷다, 바닥에 흩어진 유인물을 집어들고 집에 와 뉴스를 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이명박이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국민들의 분노가 결집되는 그 와중에도, 민주노총의 집회 동원력은 약해지고 대공장 정규직노조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조합주의의 극단으로 향하는 반면 비정규직노동자들은 끝도 안 보이는 투쟁을 지속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노동자운동은 이미 정해진 궤도를 따라가는 듯 비관적으로 보였다.
그러다 올해, 철거민들의 싸움이 몇 명의 열사를 낳은 그 날 아침, 영어학원에서 나와 냉냉한 공기가 흐르는 용산참사 현장으로 갔다. 몰려든 기자들과 경찰들이 둘러싸 북적거리는 광경을 멀찍이 바라보면서 이대로는 아니라는 생각이 한없이 밀려왔다.
그래서 사랑방에 들어갔다. 내 생활을 지배했던 규칙과 함께 삶의 과제도 변한건지 물을 겨를도 없었다. 새로운 활동에 다시 발을 담구는데, 괜하게 뜸을 들이는 시간은 아까웠다. 정신없이 뭔가에 휩쓸리며 지나온 이전의 시간을 정리해본다 건 어려운 일이고, 그저 나에게는 다시 운동을 시작할 공간이 필요했다.
사랑방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표정이 밝아졌다고 어느날, 남편이 말했다. 사랑방 교육에 나가면서, 자유권팀 회의를 하면서, 노숙인 활동가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렇게 움직이면서 내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신호일거다. 그리고 새 식단을 짜는 것만큼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어쨌건 기분 좋은 일임은 분명하다.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