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원
동료가 물었다. “오늘 남일당 가볼래?” 엉겹결에 그러마하고 찾아간 그 곳에는 저녁 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습기 머금은 동절기 특유의 어스름은 누군가가 헤집어 놓은 철거지역의 음울함을 극적으로 전시했다. 미사를 집도하는 신부의 백색 제의가 한없이 성스럽고 거룩하게 느껴질 만큼. 희미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이 가증스러워 이내 깊은 어둠으로 변한 검은 어스름을 들이키고 눈을 깜박거렸다. 참사 현장을 목격하고야 이는 마음의 동요가 당혹스러워서.
민선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였다. 옛 기억을 더듬거리면서 어린 시절의 풍경을 쫓아 가끔 찾아가기도 했다. 예전 흔적을 점차 찾아볼 수 없도록 시간은 흘렀고, 그게 서글퍼서 더 찾질 않았다. 2009년 1월 20일 이후로 다시 찾은 용산, 당시 남일당 현장 주변으론 한때 이곳이 사람들로 북적였던 시장 골목이었음을 알려주듯 여전히 장사를 하고 있는 가게들이 있었다. 용산 투쟁에 함께 하면서 그 주변 가게들도 몇 번 갔었다. 남일당이 철거되고 모든 흔적을 지운 채 덩그라니 주차 공터가 되어버린 곳을 찾게 된 날, 공터 주변에 쳐진 펜스에 용산을 추모하는 이야기를 적고 국화꽃을 달아야 할 때 슬펐다. 수년이 흘러 이제 어느 건설회사의 공사현장으로만 남아있다는 용산을 찾아가야겠다. 그리고 내 안에 용산의 기억을 다시 새겨야겠다.
디요
나에게 대부분의 사건들이 그렇듯 용산을 마주한 것도 사랑방 활동을 하면서다. 그렇다고 단체 활동이 자동으로 용산을 바라보게 만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활동을 하면서 만나게 된 용산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얼굴, 많은 표정을 인지하면서 사건보다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10년 전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용산의 여러 문제들이 한 걸음 나아가고 해결에 가까워지길 바라는 마음은 여전하다. 그래서 내가 용산을 통해 만난 사람들의 얼굴에 더 다양하고 행복한 표정이 머물러 있길 바란다.
미류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이런 것이겠지. 그날에 대한 기억부터, 10년의 시간 동안 맺어온 수많은 관계들이 떠오른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덜 개인적인- 이야기. 사랑방에서 주거권 활동을 하면서 마침 뉴타운과 개발사업의 문제를 다루던 중 용산참사를 마주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죽음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경찰보다 개발이 더 무서웠다. 경찰은 눈에 보이지만 개발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용역깡패가 등장하고 건물이 철거되고 새로운 건물들이 올라가는 때는 사실 개발이 이미 끝나있는 때에 가깝다. 누군가 죽어도 아무런 흔들림이 없고, 아무도 사과하지 않을 수 있는 때. 1년 가까운 싸움 끝에 장례를 치르고 나서 추진한 강제퇴거금지법은 강제퇴거를 막자는 법이기 전에 개발 때문에 사람 죽지 않게 하자는 법이었는데... 끝까지 추진하지 못한 죄스러움도 점점 희미해져서 무슨 일이 있고 나서야 상기하고 있으니,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 시간에 나도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어쓰
2012년, 어스름한 저녁 무렵 탁 트인 광장에서 <두 개의 문>을 봤다. 확 피어오르는 불길, 웅성이다가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특공복을 입은 경찰들, 건물 전체를 가릴 정도로 쏘아대던 물대포... 2009년 1월 20일 아직 해가 채 뜨기도 전 용산에 펼쳐진 광경을, 그렇게 간접적으로나마 지켜봤다. 광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과 함께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마른 세수를 했던 그 날 저녁,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해
으응? 무슨 일이지?
어이쿠야, 큰일이다!
으아악!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참사'를 경험하게 되는 과정은 얼추 저렇지 않을까? '으응?' 하는 시점에서 사람들이 다 같이 분노하고 모이고 목소리를 내면, 적어도 '참사'까지는 이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용산에서 참사가 일어나는 밤과 새벽에 나는 몸도 시간도 용산에 쓰질 못했다.
이후에 용산현장에, 집회에, 래군형이 갇힌 곳에 쫓아다니며 본 것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이길 때까지 버텨야 이길 수 있다는 것.
10년이 지났다고 해도, 그 말도 안 되는 진압작전에 "GO!" 싸인을 내린 책임자가 있을 텐데, 그게 누구인지도 밝혀지지 않았으니, 용산참사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직도 누군가가 더 버텨야 하는 것일지. ▶◀
세주
매주 용산을 지나는 나는 그곳 주변에서 올라가는 건물들을 보게 된다. 정말 알게 모르게 어느새 야금야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큰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씁쓸함을 뒤로한 채, 나도 모르게 발길을 서두르게 된다.
졸업 후 하는 일 없이 살고 있던 겨울 아침 뉴스에서 용산의 모습을 보았다. 국가폭력의 실체를 TV에서 보게 된 것이다. TV는 사람이야기 보다 교통흐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여러가지로 복잡했다. 용산 1주기 자료집을 읽어보는 것을 시작으로 내 사랑방 활동이 시작되었다.
벌써 10년이다. 몇 번 그곳을 찾기도 했지만,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지금 나는 다시 시간을 함께 해야겠다. 기억하자. 말도 안 되는 짓을 지시한 그놈들을 잡을 때까지 우리 모두 기억하자. 10년이든, 20년이든. 기억하자.
정록
돌이켜보면 용산은 여러모로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철거투쟁은 달동네에서나 벌어지는 줄 알았는데, 도심 한 가운데 망루가 올라갔다. 최근 몇 년 사이에야 사회적 문제로 인식된 상가세입자 권리문제를 10년 전에 충격적인 방식으로 알렸다. 용산대로변에 올라간 망루에 놀란 정부와 경찰은 도심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만들며 살인진압을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상가세입자 문제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영어로 바뀐 채 더 심각해졌고, 우리는 백남기 농민을 떠나보냈다. 어쩔 수 없는 패배감이 들지만, 그래도 용산 싸움 때문에 이명박 박근혜 시기를 더 정신 차리고 보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남아있는 과제는 어찌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