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되면 집과 사무실 근처에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늦가을은 집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큰길가에 늘어선 은행나무 아래 떨어진 노란 잎들이 수북한 시기, 다시 지하철역을 나와 사무실 가까이 다다르면 은행과 단풍나무들이 영등포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아주 예쁜 시기다. 그러다 고개를 뒤로 휙 젖혀서 하늘을 보면 쨍-할 만큼 푸른색이 너무 반가운 시기. 물론 항상 마스크를 쓰고 다니게 된 요즘엔 그 감흥이 조금 떨어지기도 했지만.
집 근처와 사무실 근처 풍경
어느 주말 (좀 슬프지만)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친구들에게 은행나무 사진을 찍어서 보내면서, 나에게 나무를 보면 의식적으로 고개를 젖혀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습관을 갖게 해 준 추억이 떠올랐다. 10년도 훨씬 전에 친구들과 함께 3주 정도 태국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조금이라도 틈이 날라치면 혼자서 멍을 때리며 깊은 분노와 우울에 가라앉던 시기였는데(생각해보면 나에게 그런 틈을 주지 않으려고 친구 셋이 쉴 새 없이 떠들고 먹이고 업고 돌아다녔던 여행이었다), 어느 날은 택시를 타고 그 유명하다는 짜뚜짝 시장을 향하고 있었다. 택시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데 하늘이 너무 푸르르고 하얀 구름이 가득 떠있고 땅과 하늘이 끝없이 넓고 높고…!!! 갑자기 너무 센치해지면서 신나는 마음에 외쳤다.
“나 이런 하늘 처음 보는 것 같아…!”
“몽아…. 아니야…. 서울 하늘도 이래. 네가 하늘을 안쳐다봐서 그래. 이제 점심 먹으러 밖에 나갈 때 무조건 고개를 들어서 하늘 한 번씩 봐.”
내 친구들은 정말 나를 사랑한다… 빈말이라고는 할 줄 모른다. (^^;) 덕분에 ‘아, 그래?!’ 크게 깨달았다. 내 상태가 정말 ‘메롱’이구나…. 그 이후에는 가끔씩 길을 걷다가도 전방을 주시하다가 대각선으로 멀리 서 있는 가로수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래서 분명히 매일 보았겠지만 아무 감흥 없이 스쳐 지나가던 서울 하늘도 가끔씩은 감탄할만한 풍경으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우울할 때는 더 우울한 노래를 듣고 괴로운 장면을 계속 곱씹으며 행복할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반동적으로 대하며 원망하던 과거에서도 조금씩 걸어 나왔다. 생각해보니 오랜 시간이 걸렸고, 사실은 아직도 지나가는 과정 중인 것만 같다. 지금까지도 ‘밥은 먹고 다니냐’며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종종 나무와 하늘 사진을 보내는 건, 나름 큰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다는 생존신고와 안부전하기 같은 나만의 의식이 되었다.
그리고 나무와 하늘같은 사진들이 사진첩에 하나 둘 쌓여 있다. 매일 지나치는 영등포공원의 무궁화 꽃이나 회의하러 간 명동길에 비를 맞아서 물방물이 맺힌 화단의 풀잎. 뜨거운 붕어빵도 식은 붕어빵도 바삭한 붕어빵도 눅눅한 붕어빵도 모두 좋아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옆 단체 동료 활동가가 사무실 오는 아침 길에 사다 준 붕어빵 봉지. 좋아하는 색감으로 만들어진 지하철 역 광고. 친구가 재밌다며 보내었는데 나도 언젠가 써먹으리라 다짐하고 저장해둔 유머 짤. 정신없이 흘려버리지 않고 ‘넘 예쁘당’, ‘진짜 맛있다!’, ‘웃겨 ㅋㅋㅋ’, ‘아이고 고맙네~’ 했던 순간들을 담아두고 다시 꺼내어본다.
언제나처럼 정신없이 연말을 향해 흘러가는 시기이지만, 한 해가 그대로 멈춰선 것 같다가도 더 뒷걸음질 친 것 같이 느껴지는 때이지만, 그래도 모두가 나처럼 ‘나무와 하늘’ 하나쯤 떠올리면서 흥얼거릴 수 있길. 한번 웃고 그러다 다시 또 하던 일 마저 하면 되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