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일간지와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의 주제는 낡은 집을 새집처럼 고쳐 사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기자가 내게 ‘썩빌’을 아느냐 물었다. 처음 듣는 말인데도 동공은 심하게 흔들렸다. 써..써...썩은...비...빌라..? 라고 유추하면서 속으로 ‘뺴박이구나’ 확신했다. 호기심이 발동해 조금 더 알아보니, 아닌 게 아니라 ‘썩빌’은 오래된 빌라를 의미하는 조어였다. 썩빌 투자는 요즘 부동산 투자자들의 인기 종목이라고 했다. 주변의 개발호재가 잘 맞아떨어질 만한 저렴한 오래된 빌라를 구매해 큰 시세 차익을 남기는 게 투자의 포인트였다.
이른바 "내 집 마련의 꿈"을 꾼 적은 없지만 살 만한 공간에 대한 원대한 꿈은 항상 꿈꾸어 왔다. 내게 살만한 집이란 크게 난 창으로 잎이 무성한 나무를 원없이 볼 수 있는, 사시사철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집, 그것도 오래된 벽돌집, 나는 그런 집을 보며 늘 말해왔다. 저런 집에 살면 원이 없겠다. 그리고 나는 꼭 그렇게 생긴 집을 내 전세금과 애인의 전세금 그리고 집값의 1/3 가량을 담보대출로 ‘장만’했다. 공교롭게도 그즈음 아파트 장만이 어려운 내 집 마련 수요가 빌라나 연립주택으로 몰리고 있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썩빌투자’ 라는 말까지 등장한 것이다. 이제 아파트를 넘어 오래된 연립주택이나 빌라도 자산증식의 도구로 조명되고 있다. 물론 부수고 새로 지어진다는 전제가 있어야 그 가치는 실현된다.
나는 뭐든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 단지 오래된 걸 좋아한다기보다, 잘 보존된 헌 물건을 좋아한다. 거기엔 새 것이 주는 일말의 위화감이 없기 때문이다. 헌 것을 구매하는 일은 물건을 길들이는데 혹은 물건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일정한 분량의 시간을 구매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건 내겐 아주 멋진 일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내게 오래된 주택은 세월이 잘 응축된 물질적 존재다. 누군가에 의해 잘 보존된 오래된 주택은 일종의 원숙미를 넘어 범접할 수 없는 오라(aura)가 느껴지기까지 하는데,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도 가끔 그런 오라가 느껴진다. 최근에 건축가 김중업이 1983년 설계한 사직동 주택이 일반에게 처음 공개되었다. 사진으로만 접했는데, 그 아름다움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세월을 거듭하며 독자적인 멋을 갖춘 시간적 존재로서 김중업의 그 주택은 낡은 탓에 더욱 빛나 보였다. 그러나 이 부동산 광풍에서 그런 아름다움은 큰 쓸모가 없이 느껴진다. 아닌 게 아니라 김중업의 그 사직동 주택은 3년간 버려져 있다가 최근 SH가 매입해 곧 철거가 된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득 이 집으로 이사온 날 동네 주민이 내게 건넨 말이 떠올랐다. “잘 오셨어요. 여기 곧 재건축될 거예요.” 그건 그 사람이 내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환대 내지는 축하의 말이었을 것이다. 오래된 동네, 오래된 집의 정취가 좋아 대출이라는 것을 감행하면서까지 이사를 했건만, 시시때때로 재건축 논의가 수면 위로 올라온다. 그리하여 이사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새내기 이웃이 툭하면 재건축 찬성론에 선 이웃들과 얼굴 붉힐 일이 생겨났다.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내 명의의 집이 있다고 한들 주거는 언제고 불안해질 수 있다는 불안이 엄습한다.
평소 주변으로부터 분수를 모른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어왔다. 나는 정확히 그 지점에서 내 집에 전복적인 의미를 담아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 사는 집이라 이름 붙였다. ‘니 분수를 알라’는 말은 이 사회에서 기본적인 권리를 포기하라는 말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은 질 나쁜 주거 환경에 사는 건 자기 분수를 아는 일이 된다. 내년 초부터 소득에 따른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더 강화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소득이 적으면 집을 구하는 게 더 어려워지는 셈이다. 한편 채광을 위해 마련된 공동주택 단지 내 건물(동)간 이격거리 규정도 완화됐다. 이제 아파트 동간 거리가 지금보다 최대 절반 이하로 짧아질 수 있다. 누구를 위한 주택정책일까. 살만한 집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지 오래고, 이미 충분히 안정적인 자원을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게 ‘집’ 이 되었다. 점점 내가 원하는 주거 공간을 꿈꾸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분수를 모르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집은 쉬고 재생산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 그것만으로 거기에 ‘분수를 알라’는 말이 끼어들 틈이 없다. 오로지 부수고 새로 지을 수 있다는 이유로 오래된 건물에 가치가 매겨지는 게 아니라 뭐든 잘 가꾸고 보존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다. 그런 세계에서 오래된 빌라에 썩빌이라는 조어는 가당치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좀 더 나다운, 그리고 나무가 보이는 살만한 집에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걸 두고 분수를 모른다고 한다면 기꺼이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솔직히 내가 사는 연립주택은 썩었다고 하기에 너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