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록
서울은 복잡하고 큰 도시이지만, 지하철이 있어서 그리 어렵지 않게 곳곳을 다닐 수 있었다. 버스를 타는 건 별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지하철만 타고 다니다가 4대문 안팎은 버스로는 굉장히 짧은 거리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나에게 지하철은 서울을 상징하는 이미지다.
미류
지하철 하면 파업이 먼저 떠오르던 때가 있었다. 전설로만 들었던 1994년 서울지하철 노조의 파업과, 현실로 접한 2000년의 무파업 선언 사이에 시대의 변화가 박혀 있을 텐데... 괜히 멋지고 괜히 화났던 기억만 아스라하다.
몽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의가 대부분 대흥역 인근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열리다 보니, 은평구에 있는 살림의료사협에 자주 가다 보니 지하철 6호선은 내가 가장 빈번하게 타는 노선 중 하나가 되었는데... 몇 년 전 안내방송으로 흘러나오는 기관사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내용도 뭔가 뭉클했고, 무엇보다 내가 현생에서 들어본 가장 좋은 목소리였다. 그 이후로 같은 목소리를 딱 한 번 더 들었는데, 아직도 6호선을 타면 언제가 다시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기대한다. '지하철 기관사 인력 감축' 소식이 들려오면 슬픈 이유.
해미
육상에서는 쉽게 멀미가 나는지라 지하철을 즐겨 타는 편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지하철마저 다소 불편하고 불안한 장소가 되었다.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지하철은 사람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지하철을 타고 떠나며, 누군가는 안에서 밖으로 내쫓기거나 기어코 멈춰 서지 않는 지하철 앞에 남겨진다.
결국 사람을 가리는 건, 지하철에 몸을 싣고선 뒤돌아보지 않는 또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종점은 결코 안전지대는 아닐 것이다.
어쓰
정말 많은 지하철 노선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놀라곤 한다. 내 머리 속의 수도권 지하철 노선도는 아직까지도 1호선에서 8호선에 분당선 정도만 있는데... 사무실에서 신림으로 가야 했던 날, '신림선'이라는 것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김포골드', '서해선', '경강선', '에버라인'까지. 이제 정말 인터넷 지도 없이는 나다닐 수가 없는 시대인가 보다.
민선
사무실 근처 신길역에서 5호선을 이용할 때 엄청난 계단을 오르내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2018년 지금 이곳 사무실로 이사를 왔는데 그 전해 신길역에서 휠체어리프트가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이후 설치된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로 신길역 5호선을 오갈 때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정말 큰 빚을 우리 모두가 지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대용
서울로 이주해오고 지하철은 낯설고 도시적인 교통수단으로 스크린도어가 없던 시절에는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에 가까웠다. 이제는 지하철보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보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왜일까. 십수년이 지나면서 지하철 노선도 더 연장되고 굉장히 복잡해졌지만 그보다 복잡한 서울지리가 이제는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게 되어서이려나.
가원
나무를 원 없이 보고 살고 싶어 지하철 다니지 않는 산골짜기 같은 동네로 이사를 감행했다. 그 결과 내 집은 서울 어디를 가든 최소 50분이 걸리더라.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꽤 공명정대한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