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월 6만5천원에 서울 내 버스, 지하철, 자전거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정기이용권 ‘기후동행카드’ 도입을 발표했다. 버스 요금 인상 한 달 만이다. 내년 1월부터 5월까지 시범운영을 하고 이르면 내년 7월 본격 시행한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하고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달 평균 대중교통 비용을 떠올리면서 각자의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월평균 교통비용이 6만5천원을 훌쩍 넘어서는 나는 반드시 쓰겠다는 쪽에 손을 들었고, 또 다른 동료는 현재 쓰는 알뜰교통카드와 견주어 볼 때 더 나을 게 없다며 사용에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서울 내 이동에만 한정하니 경기도민인 동료는 서울로 출퇴근을 하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다. 요금 상품을 고르듯 한바탕 떠들고 나서야,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이 카드의 도입 취지가 눈에 들어온다. 과연 기후동행카드라는 요금정책은 기후위기시대에 필요한 공공교통의 요구를 실현하는 카드가 될 수 있을까.
기후동행카드에 생기는 질문들
교통요금을 통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노력은 중요하다. 이는 국제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지난해 6-8월 독일은 전국에서 운행하는 모든 대중교통을 9유로 티켓 한장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요금정책을 시범적으로 펼친 결과, 대중교통 이용률을 25% 높여 상당한 이산화탄소량을 감축하는데 성공했다.
국내에서도 정의당이 발의한 월 ‘3만원 프리패스’에서부터 시민사회에서 요구해온 ‘1만원 교통패스’ 등 요금을 통한 대중교통 활성화 요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서울시뿐만 아니라 부산, 세종 등 지자체마다 저렴한 정기권 또는 무상교통 도입을 발표했고, 정부여당도 지하철·버스 통합 정기권인 '케이(K) 패스'를 도입하기로 결정해 그야말로 '대중교통' 요금정책은 우리 사회 뜨거운 의제로 급부상 중이다. 특히 서울시는 여기에 ‘기후’라는 분명한 주제어를 입혀 이목을 끌고 있다. 실제 서울 시내 온실가스 전체 배출량 중 수송 분야 배출량이 17%나 차지하기에 승용차 이용의 수요를 대중교통 수요로 전환하는 일은 시급하다. 서울시는 기후동행카드 도입으로 연간 1만3천대 가량의 승용차 이용이 감소해 의미있는 온실가스 감축 효과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서울시가 새로운 요금정책을 통해 기대하는 성과를 성취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인상된 대중교통 요금을 기준으로 볼 때 기후동행카드로 요금의 혜택 폭이 크지 않은 점, 동일한 생활권이나 마찬가지인 경기도에서의 사용이 제한되는 점, 서울 시내에서도 기본료가 다른 광역버스에는 적용이 안 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대중교통 이용률을 실질적으로 얼마나 늘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 지역이 전국의 교통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의 40%를 상회할 정도로 높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서울에서만 적용되는 교통요금체계로는 온실가스 감축 효과를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 다른 한편 서울시가 대중교통 전용지구를 해제하고 남산에서 걷던 혼잡통행료도 폐지하는 등 사실상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카드 도입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행보를 동시에 보인다는 점에서 기후동행카드의 목표가 명확하게 기후위기를 겨냥하는지 의구심은 커져만 간다.
공공교통, 교통요금을 낮추는 것 넘어
대중교통 요금은 저렴해질수록 이용자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승용차 이용 저감과 온실가스 감축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후위기 대응의 현실적인 방안이다. 그러나 요금 혜택을 통한 대중교통 활성화만으로 기후위기 대응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거나 그 자체로 공공교통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서울시 버스의 운영 체계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서울시 버스는 준공영제로 노선 설정권은 시에서 갖고 버스회사는 여기에 맞춰 운영하는 체계다. 과거 돈이 되는 노선에 버스회사들이 과도하게 경쟁하고 돈이 안 되는 노선은 폐지하며 이윤추구에만 매몰되는 버스 운영 폐해를 막고자 2004년 서울시가 처음 도입한 게 바로 준공영제다. 지자체는 버스회사의 운행 실적에 따라 수익금을 배분하고, 운송수입금이 원가보다 적으면 이 부족분을 지자체 재정으로 보조해준다. 지자체의 통제와 관리가 필수적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2022년 서울시에서 준공영제로 운영되는 버스회사에 지급한 보조금이 8천억에 이른다. 이 총액이 어떻게 65개 버스회사에 분배되었는지 그 적절성에 대한 검증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단적으로 단기이익을 노리는 사모펀드 운용사가 준공영제 버스업체를 인수해 수익을 얻고 투자자에게 거액의 배당금을 챙겨주는 최근의 흐름은 준공영제하에서 활성화되는 대중교통이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는 기대를 접게 한다. 이런 구조에서 기후동행카드를 통한 대중교통 활성화가 서울시의 기대만큼 되지 않는다면 또다시 ‘적자’ 운영에 대한 청구서가 이용자에게 날아들 것이다. 그게 통하지 않는다면 버스회사는 노동자의 인건비를 삭감하거나 해고하며 안전운행에 드는 비용을 낮추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교통정책에 공공성을 높이자고 도입된 준공영제였지만 ‘공공’의 책임과 역할을 지우고, 버스회사의 이윤을 보장해주는 제도로 기능하고 있다. 이 현실을 바로 잡을 공영제로의 전환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서울시에 공공의 책임과 역할을 분명히 하고 궁극적으로 ‘공공교통’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한편 대중교통 활성화 대책으로 기후동행카드를 내세우는 서울시에 모두의 자유롭고 안전한 이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고민과 의지가 보이지 않는 것도 문제다. 단적으로 서울시는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장애인단체의 지하철 시위에 열차 운행 지연 등에 대한 책임을 물어 총 8억원 규모의 손해배상도 청구했지만, 해당 시위로 불편을 겪은 시민들에게는 운임을 환급해주기로 결정했다. 서울시의 교통체계가 누구의 이동을 선택적으로 배제하는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서울시장은 지하철이 “1분이라도 늦으면 큰일”이라며 정시성을 지키는 게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이라고 설파했지만, 그 책임 아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으며 1분이라도 지각하면 안 되는 착취적인 시스템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서울시가 물어준 환급금은 대중교통 ‘상품’을 구매한 소비자를 위한 것일 수는 있어도, 권리로서 공공교통을 요구해온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닌 이유다. 공공교통은 단순히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것을 넘어 교육, 여가, 돌봄, 관계망 구축과 같은 삶의 필수요소를 연결하고 조직한다는 점에서 권리다. 사회와 접속하고 연결될 권리가 지하철 문앞에서 끊긴다면, 그것은 공공교통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단순히 이동수단의 확장이 아닌 삶을 확장하고 다르게 조직하기 위한 공공교통으로의 전환이 기후위기시대 우리가 채워나가야 할 목표이자 방향이다.
기후정의 ‘카드’가 되려면
공공교통을 향하는 기후위기 대응조치에 필요한 것은 요금만이 아니다. 지난 30년간 수도권의 모든 교통망이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개발되어온 것은 국가와 지자체의 재정 투입이 수익성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교통의 높은 수익성이 곧 대중교통 이용자의 전체 편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교통분야의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기본 전제는 전체 이동거리를 줄이는 것이다. 지금처럼 수도권 인구의 상당수가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는 데는 일자리나 교통망 등 거주지역 근처에 필요한 시스템이 없거나 부족한 이유가 절대적이다.
기후위기시대 공공교통의 목표가 더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더 많이 도로를 깔고 더 많이 버스를 배차하여 도로 위를 대중교통으로 혼잡하게 메우는 것일 수 없다. 공공교통에 대한 요구는 심야버스를 확충할 것이 아니라 밤낮없이 일하며 높은 노동강도를 강제하는 사회적 조건의 변화와 연결되어야 한다. 시간 빈곤으로 인해 메뚜기처럼 이동하는 삶이나 오래 일하고 오래 이동해야 하는 불평등한 삶의 조건을 바꾸기 위한 전환의 그림 속에 장기적으로 구상하고 실행해야 한다. 기후위기시대에 우리가 요구하며 나아가야 할 방향은 더 저렴하게 더 많은 이동이 아니라, 불필요한 이동을 줄이고 덜 이동해도 지속가능한 삶이다. 이는 결국 삶의 공간을 재배치하며 연결망을 다시 만드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럴 때 무제한 정기권이든 무상교통이든 교통요금정책이 탈 것만의 전환에 그치지 않고 기후 부정의한 세계를 정의로운 세계로 전환을 촉매하는 ‘카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후동행카드 넘어 그 전환을 요구하고 만들어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