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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인 인터뷰

인권활동이라는 유학생활을 마친

지나 님을 만났어요

언젠가 이웃 단체인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편의점 음식을 이따금씩 가져다 주신적이 있습니다. 어디서 났는지 여쭤보니 회원 중에 ‘남다른’ 편의점을 운영하는분이 계시다고, 그 집에서 얻어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가보다 하고 맛있게 먹기만 했었는데요. 시간이 지나고 들에서 새롭게 활동을 시작한 지나 님을 소개해주면서 제가 맛있게 먹은 편의점 음식을 제공해준 그 분이 지나 님이었다고 하더라고요. 도대체 어떻게 활동을 시작했는지 너무 궁금했는데, 몇년 전부터 사랑방 후원도 시작해주셔서 이번 기회에 작심하고 여쭤봤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활동하는 지나 입니다. 이제 더는 신입활동가라고 말하기 무색하게 어느새 5년차가 되었어요. 그런데도 사실 인권활동가라는 말이 입에 붙은 건 최근 1년 정도예요. 지난 4년 동안은 인권활동이란 유학생활을 한 듯한 느낌이었달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인권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더욱 궁금한데요. 활동을 제법 늦게 시작하신 편인데 그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먼저 말씀해주세요.

원래 어린이집 교사를 13년 했어요. 보조 교사 기간까지 합치면 15년을 했거든요. 제가 가진 재주와 적성이 어린이집 선생님과 너무 잘 맞았어요. 노래 부르고, 피아노 치고, 교실 꾸미면서 어린이들이랑 이런저런 활동하는 게 다 저에게는 일로 여겨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린이집 교사를 하는 동안에도 언젠가는 청소년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교회를 오래다녀서 그런가? 원래 꿈이 교사이기도 했거든요.

결국은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청소년 지도사 자격증을 따려고 준비했어요. 근데 중간에 그것도 포기했어요. 소위 ‘일진’이라 불리는 청소년들이 담배를 피우며 놀던 놀이터가 집 앞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청소년 지도사를 하면 그런 청소년들을 주로 상대한다고 하더라고요. 청소년기에 겪었던 폭력 경험이 생각나면서 겁이 덜컥나더라고요. 그래서 그것도 접었죠. 하지만 청소년을 만나는 일은 계속 하고 싶어서, 이번엔 학교 앞에 떡볶이 집을 차려야 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고등학생 때 하루도 안 빼놓고 학교 앞에 떡볶이를 사 먹었거든요. 저도 분식집을 차리면 저와 같은 학생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한 1년을 준비했어요.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떡볶이 집에서 간식을 안 먹는다고 하더라고요. 이제는 그런 공간이 편의점이라고 하길래 방향을 틀어서 편의점을 열었어요.

 

청소년과 만나는 일을 하고 싶어서 편의점을 열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봐요. 그래서 정말 청소년들과 만날 수 있었나요?

편의점을 열려고 하니까 본사에서 3곳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 중 하나가 중학교와 초등학교 사이이길래 바로 여기서 하겠다고 했어요. 그 즈음에 이미 청소년 노동인권센터 ‘꼼지락’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있긴 했는데요. 아는 언니가 저에게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해서 노동도, 인권도 모르는데 청소년만 보고 시작했어요. 꼼지락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온 인권교육센터 들의 활동가를 그때 처음 만났던 거죠. 그 덕에 편의점에 오던 어린이/청소년들과 대화하면서 오히려 ‘일진’ 친구들과도 더 친밀하게 지내게 되었어요.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학업, 진로, 집안, 친구와의 갈등 등 다양한 고민들을 편의점에서 상담하면서 만나게 된 거죠. 시간대별로 오는 청소년도 다 달랐어요. 아침 7시 고등학생, 8시 중학생, 8시 반 초등학생, 오후 1시 저학년, 3시 고학년, 5시 중학생, 7시 고등학생, 9시에 학원 안 가는 친구들, 11시 넘으면 이제 학원 끝나고 오고, 마지막으로 새벽 1시 넘으면 집 나온 청소년들까지 말이죠. 나중에는 가게가 좁으니까 청소년들이 바깥에서 놀면서 저 멀리에서 내가 보이면 소리지르면서 나를 불렀었어요 “야, 이모 온다.” 그러면 애들이 다 동시에 난리가 나요. 근데 편의점에 가는 길이 한 길 밖에 없거든요. 그게 너무 창피해가지고 돌아서 상가 안쪽 문으로 들어간 적도 있어요.

 

우와. 그냥 편의점이 아니었네요. 동네에 소문이 쫙 났겠는 걸요? 편의점이 아니라 영화에서 나오는 청소년 센터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청소년들만 북적이는 데 장사는 좀 되었나요?

사실 편의점이 제 생계이기도 하니까 걱정도 되었거든요. 두 가지 인데, 하나는 청소년이 너무 북적거려서 장사가 안되면 어떡하지와 두번째는 소음관련 민원이었었거든요. 결론적으로 둘 다 잘 되었어요. 편의점 장사는 담배 100갑 파는 것보다 컵라면 100개 파는 게 이득이란 얘기를 하거든요. 저희는 고맙게도 청소년들이 단골이 되어 주었거든요. 집가까운 편의점 두고 일부러 저희 편의점으로 오거나, 이사를 가도 찾아와줄 만큼 자주와서 이야기나누고 또 팔아주기도 했어요. 민원도 당시에 제가 그동네 사람들의 자녀들과 잘 지내고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동네 엄마들이 시끄러워도 민원 넣지 않고 편의점에 오셔서 인사도 하고 가시고 그랬어요. 아이가 너무 좋아해서 어떤 분인가 궁금했다고 고맙다고 하면서요. 나중에는 제가 화장실 갈 때 청소년들이 서로서로 가게도 봐주고, 재고 떨어지면 말해주고, 인기 있는 물품도 알려주고요. 저희끼리 2시, 8시 기다렸다 폐기 땡 되면 나누어 먹기도 하면서 친구처럼 지냈죠.

 

지나 님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궁금해지는 게 있는데요. 꿈이셨던 청소년이 매일 같이 찾아오는 편의점을 만들고, 동시에 장사도 잘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들 활동을 시작하게 된거에요?

편의점 앞에 파라솔을 쫙 피면 학교나 학원을 마치는 시간에 어린이/청소년들이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먹어요. 그런데 아까 말했던 소위 ‘일진’ 청소년이 등장하면 그 파라솔에서 간식을 먹던 다른 청소년들이 다 사라져요. 그게 고민이 되는 거예요. ‘일진’ 친구가 “야 신발 끈 매줘.” 그러면 막 이렇게 신발 끈 매주고 하는 그런 장면들 말이죠. 이런 장면을 볼 때 그게 왜 폭력이고, 왜 하면 안 되는지 말해주고 싶은데 설명하려면 막상 어렵잖아요. 꼭 이런 장면이 아니더라도, 어린이들이 어른들에게 야단 맞고 왔을 때 저에게 속상함을 말해줘요. 그럴 때 “어린이, 청소년, 비청소년은 모두 다 동등한 사람이다.” 이렇게 어렵게 얘기할 수는 없잖아요. 저는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 몰랐던거죠.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냥 컵라면 정도 같이 먹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 정도였던 것 같아요. ‘인권의 언어’가 없었어요. 그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을 나누어 준 짝꿍 같은 사람들이 ‘들’의 활동가들이었어요.

청소년들이 진짜 소소한 조력도 못받는 경우가 많거든요. 예를 들어 청소년이 친구한테 돈을 빌려주고 싶은데 은행 거래를 할 수 없는 상황인 거예요. 그럼 2만 원을 들고 와서 제 계좌를 이용할 수 있냐고 물어봐요. 자기가 2만 원 줄 테니까 부산에 사는 친구에게 좀 보내주고 싶다고 말이죠. 아주 소소하고 자잘한 도움인데 주변에 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어른이 이렇게 없나 싶더라고요. 저에게 별거 아닌 건데 도움을 주고 받으니까 관계가 쌓이고, 저는 맨날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대부분 어린이/청소년들한테 그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거리에 어른이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제가 친밀한 ‘이모’가 됐었죠.

편의점에 와주는 청소년들과 엄청 애틋한 관계이지만, 어쨌든 저랑 만나는 청소년 말고도 훨씬 더 많은 비슷한 처지의 청소년들이 있는 거잖아요. 어린이/청소년들이 이런 소소한 고민이나 도움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지 못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활동이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더라고요. 이면의 구조를 좀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막상 그만둘 때는 엄청 고민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출근 할 때마다 저 멀리 편의점이 보이면 막 눈물 나고. 사실 저는 활동가라는 직업을 살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들에는 특히 청소년 인권에 관심 있는 활동가들이 많았고, 그러다보니 도대체 이 사회 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이런 세상이 온 것인지, 그리고 이 활동가들은 뭘 바꾸려고 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제가 이 활동을 같이 한다면 뭔가 좀 다른 세상이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렵게 결심한 들의 활동은 막상 해보시니 어떠셨나요?

처음 1년 차는 외국으로 어학 연수나 유학 온 것 같아서 정말 하나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한 3년은 그냥 이렇게 눈으로 보고 쫓아가는 것도 바빴던 것 같고요. 4년 째가 되어서야 귀가 뚫려서 이제야 무슨 얘기하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드디어 질문을 시작하게 된거죠. 최근에는 기숙사에 사는 딸에게 이런 문자를 받았어요. 얼마 전에 계엄령이 있었잖아요. “엄마, 인권운동도 좋지만 만약에 국회에 가게 되면 미리 말해야 된다.” 이렇게요. 아, 가족들도 내가 인권운동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들만큼 제법 활동을 했구나 싶어요.

 

그럼 이제 방향을 좀 바꾸어, 인권활동가 지나 님은 요즘 들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지 소개해 주세요.

재난과 인권 교육 관련된 연구 사업을 하고 있어요. 세월호 참사 이후 재난이 발생하면, 대책위원회 활동을 많이 하잖아요. 구술 작업도 하고. 그런데 이 활동들은 주로 발생 이후에 결합하게 되는 게 많아요. 하지만 슬프게도 재난은 언제든 또 발생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재난 자체를 권리로 접근하려는 문제 의식 속에서 연구 사업이 시작되었어요. 가령, 재난 예방 교육 등을 권리로 접근하면 무엇이 달라질지 살펴보는 작업이죠. 또, 구호 활동의 과정에서 인권을 기반으로 접근하기 위해 필요한 것도 살펴보고요.

올해 상반기에는 세미나를 중심으로 진행했고, 하반기에는 연구 보고서를 쓰는 작업을 진행했는데요. 개인적으로 정말 어려웠어요. 흰머리가 장난 아니게 늘었고요. 교육 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갑자기 교육 장소에 도착하는 꿈도 꾸고요. 그래도 지금은 원고를 털었고, 연말이나 내년 초에 발표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내년부터는 이 연구를 토대로 직접 인권교육을 다니려고 하고요. 이제 새로운 분야에서 1년 연구한 것이니까 실제로 교육을 하면서 계속 업데이트 해나가고 현장의 이야기가 스며들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

 

재난과 인권교육을 연결하는 연구 발표회라니 참 기대되네요. 그럼 마지막으로 사랑방 활동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요?

제가 들 활동가가 되기 전에 사랑방이 홍대에 있던 시절부터, 사랑방을 알고는 있었는데요. 그때는 머리에 띠 두르고 대자보 쓸 것 같은, 영화에 나오는 운동하는 단체처럼 생각했던 것 같아요. 들보다 훨씬 딱딱한?! 그러다가 들 활동을 시작하면서 느낌이 많이 바뀌었어요. 들과 사랑방이 밥당번을 나눠 하잖아요. 사랑방 식구들이 점차 저에게는 유학생활 동안 같이 밥 먹는 친구들 같은 느낌으로 바뀌더라고요. 사랑방 30주년 행사 날 조금 도와주는 데도 이제는 무슨 가족 행사에 참석한 친척이 된 것 같더라고요.

요즘 사랑방은 정말 다양한 의제의 최전방에 있는 활동가구나 싶어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체제 전환 운동이 만들어지기까지 사랑방에서 엄청 고민을 많이 했잖아요. 그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늘 고마운 마음이었어요. 최근 계엄령이 터졌을 때, 그 새벽에 진짜 엄청 우리 황당했잖아요. 앞으로 우리 함께 밥 든든히 먹어야 겠다, 제가 든든히 먹을 수 있도록 잘 준비해 보겠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