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고등판무관(The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 제도는 48년 유엔 인권선언이 채택된 이래로 계속해서 논의되어온 문제이다. 그러나 이 제도가 93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 준비과정에서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면서 다시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사실 최근 유엔 인권기구 실무자와 국제인권운동 활동가 사이에서는 유엔 인권관련기구의 조직과 구조가 복잡하여 기구들과 부서들간의 업무 조정이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가 증대되었다. 게다가 세계 각 지역에서 빈발하는 긴급한 인권침해 사태에 유엔의 인권기구들이 제대로 효과적인 대처를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았다. 이에 대한 대안의 하나로 유엔 내에서 인권과 관련된 문제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인권고등판무관제도의 설치가 제안되었다. 따라서 인권고등판무관 제도는 93년 6월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서 중요한 이슈의 하나로 다루어졌다.
이 제안은 많은 민간단체의 지지를 받았는데 국제엠네스티(AI)가 가장 적극적으로 이 캠페인을 주도하였다. 비엔나 대회에 제출한 국제엠네스티의 제안 문은 “유엔의 인권기관은 지구상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발생하는 고문, 실종, 비 사법적 처형 등 중대하고 조직적인 인권침해 앞에 무력하다는 사실이 매우 충격적이다”고 지적하면서 인권고등판무관제도가 “유엔 인권기구의 구조적 문제를 단기적으로 해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비엔나 대회는 이러한 제안을 검토한 후 “제48차 유엔총회에서 대회보고서를 검토할 때 모든 인권의 신장 및 보호를 위한 인권고등판무관의 신설문제에 대한 고려를 우선적으로 사안으로 다루기를 권고한다”는 항목을 ‘비엔나선언 및 행동계획’에 포함하였다. 이에 따라 93년 12월 20일 유엔 총회는 인권고등판무관을 신설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번역전문은 하루소식 80호, 94년 1월 7일자).
결의안에 따르면 인권고등판무관은 사무부총장(Under Secretary General)급으로 유엔사무총장이 지명하여 총회의 승인을 거쳐 임명되고, 지역별 순환원칙을 따르며 임기는 4년으로 1차에 걸쳐 연임이 가능하다. 주요 권한으로 모든 사람의 시민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권리의 향유를 증진 및 보호하고, 이를 위해서 유엔 인권센터의 업무감독, 인권기구의 업무 조정 등의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사무실은 제네바에 두고 연락사무소를 뉴욕에 두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이 결의안에 따라 에쿠아도르 출신 외교관인 호세 아얄라 라소(Jose Ayala Lasso)씨가 94년 2월 1일 인권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인권고등판무관제의 신설과 라소 씨의 임명에 대해 많은 국제인권운동단체들은 실망하거나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인권고등판무관의 책무를 애매하고 추상적으로 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할을 매우 축소하였기 때문이다. 국제엠네스티의 제안 문에서 지적했듯이 인권고등판무관이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인권침해 사례에 대한 조사(fact-finding)와 긴급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특사파견’ 등의 권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 부분이 결의안에서 제외된 것이다. 대신 ‘정부와 대화한다’는 매우 애매하고 약한 구절이 삽입되었다. 이는 인권고등판무관제도가 서방국가의 ‘인권외교’에 의해 ‘악용’될 것을 우려한 중국 등 일부 제3세계 국가의 반대에 직면하여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둘째 이유는 호세 아얄라 라소 씨의 성향과 배경 때문이다. 라소 씨는 현재 62세로 에쿠아도르 정부에서 62년부터 77년까지 일했는데 최종 직위는 외무부장관이었다. 이후 그는 벨기에, 페루 그리고 유엔 대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최근까지 외교관으로 일해 왔을 뿐 인권분야에서 직접 일해본 경험이 전혀 없기에 수많은 인권문제를 어떤 입장을 가지고 해결해 나갈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일부의 우려를 의식한 듯 올해 2월 제네바에서 열린 약 50여명의 NGO대표와의 간담회에서 “나는 여러분이 (인권침해 사태에 대해) 즉각적인 행동을 원하고 고등판무관도 즉시 사태에 대응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 나의 견해는 다르다. 나는 인권문제에 외교를 도입하여 정부를 대화에 참여시키기 원한다. 나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이다. 그리고 외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지난주 7월 18일 제3차 유엔 아태 지역 인권워크샵 기간 중 한국인권단체협의회(KOHRNET)와 간담회를 가진 라소 고등판무관은 자신에 대한 민간단체의 기대와 우려를 의식한 듯 한국인권문제에 대해 적극적 관심을 표명하였고 민간단체와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인권하루소식> 208호, 7월 19일자 참조).
한편 유엔 인권센터 등 인권기구의 실무자들은 “유엔의 모든 인권기구와 제도가 그러하듯이 인권고등판무관도 한계가 있음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오히려 중요한 것은 민간단체들이 신설된 고등판무관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개발하는 것이다”고 강조하였다. 이번 서울 워크샵에 참석한 유엔 인권센터 한 관계자는 “비록 인권고등판무관제도가 신설되었고 고등판무관도 임명되었지만 아직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실무부서(Infrastructure) 등이 준비되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인 활동의 내용과 방향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민간단체들이 적극적으로 고등판무관에게 적절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하기도 하였다. 결국 인권의 보호와 증진은 민간단체가 주체적으로 주도해야할 영원한 과제라는 것이 이번 인권고등판무관제도의 설립과 임명을 보면서 얻은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