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 권리인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
모든 인권은 ‘상호의존적이고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시민․정치적 권리’와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를 나누어 말하는 것이 거의 습관적인 방식이 되었고, 유엔의 인권선언에서 표명된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가 문헌상의 권리인지 아니면 ‘이상’이나 ‘열망하는 최종목표’인지는 항상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다. 일부 학자들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는 보편적이지도 않고(모든 인간이 아니라 노동자, 빈민, 장애인 등 특정범주의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되기 때문에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실체법적이지도 않으며 시민․정치적 권리와는 논리적으로 다른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진정한 인권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주장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제. 사회적 권리가 사법심판의 대상인가의 문제이다. 즉, 권리가 법에 의해 집행될 수 없다면 전혀 권리일 수 없다는 것이다.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의 위원장인 Alston교수는 “실체법학파에게 있어서는 공식적인 재판회부가능성이 권리의 필수 불가결한 속성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법적 청구권의 개념은 그 청구권자가 법적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보상과 연결된다. 그러나, 경제. 사회적 권리는 때로 이용할 수 없는 자원에 대한 청구를 포함할 수 있고, 적절한 자원에 대한 문제는 사법적 판단보다는 행정적인 프로그램의 확립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경제․사회적 권리는 단지 불완전한 재판회부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권리의 지위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법심사가능성(justiciability)에 대한 이런 협의의 해석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있어 넘지 못할 장벽이 아니다. 즉. 이를 협소하게 재판과정에만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재검토(review)과정의 문제, 시행(enforcement)과 성취(implementation)의 문제로 정의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재검토 과정에서 다루는 시행과 성취의 판단은 당사국과 국제적 영역 둘 다에 존재하는 규범과 기준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사법심사가능성’의 관점보다는 ‘협의(consultation)’의 과정이, 특히 국제적 영역에서 더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국제인권규약에 따른 보고절차와 그에 따른 정부보고서의 심의와 평가, 권고 등으로 현실화되어 있다. 결국, 권리에 있어 ‘현재의 실현가능성’과 ‘충분한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구분하고자 하는 법률가들의 영향 때문에 권리는 현재 실현 가능한 것이고 가능해야만 하는 것으로 협소하게 해석된 것이다.
둘째, ‘소극적’ 권리와 ‘적극적’ 권리간의 구별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자유권을 보호하는 데에는 거의 경제적 자원이 필요치 않다는 점이다. 즉, 정부의 입법조치나 특정한 불법적인 공권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방침 이상으로 더 필요한 것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경제. 사회적 권리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무겁고 복잡한 부담이 정부에 주어지기 때문에 이를 즉각적으로 완전히 보장하라는 요구의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이에, 한 예를 들어보자. ‘고문으로부터의 보호’의 권리는 전형적인 소극적 권리로써 발전되어왔다. 그것은 국가가 개인적 자유와 신체적 보전에 대한 침해를 삼가는 것 이상의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경찰을 훈련시키고 감독하고 통제하는 주요한 ‘적극적’ 프로그램을 필요로 한다. 많은 나라에서 이것은 매우 비용이 들뿐만 아니라 사회제도를 바꾸지 않고는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 어떤 경우에서건 고문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상당한 적극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고, 마찬가지로 모든 인권은 국가 편에서의 적극적 행위를 필요로 한다.
셋째, 또한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소극적’ 권리는 ‘간섭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에, 간섭의 부재를 의미하는 ‘자유와 자율성’의 주장은 능력이나 자원의 부재에 의한 제약과는 구별되며, ‘자원이나 기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 예로, 시장의 결과는 사고 파는 것과 그 밖의 모든 종류의 조건을 받아들인 개인적 결정에 의한 의도되지 않고 예견되지 않은 결과이다. 그러므로 빈곤은 의도적 행위에 의한 결과도 아니고 자유의 제한도 아니다. 빈곤이 부자유가 아니기 때문에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빈곤을 제거하려는 것은 국가의 강제적 행위를 필요로 할뿐이고 이는 자유에 대한 의도적 강제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간섭 또는 강제로부터의 자유가 행위능력을 실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부라고 보는 소극적 권리의 주장은 권리해석에 있어 많은 한계가 있다. 자유가 단지 의도적 강제로부터의 자유일 뿐이라면 그런 자유의 가치는 무엇이고, 도대체 왜 자유롭기를 원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강제’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기 원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능력(ability)에 대한 사고가 자유의 가치를 정당화한다.
개인에게 있어 자유의 가치에 관심이 있다면, 그 자유로 인해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에도 또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자원’을 필요로 하는 행위에 효과적인 동력으로써의 자유, 자원에 대한 권리를 필요로 하는 자유의 가치만이 각 개인에게 평등한 자유의 가치를 보장할 수 있다.
또한, 시민․정치적 권리가 소극적 권리라고 해서 그것이 우선 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시민․정치적 권리의 침해는 직접적인 손상을 가하지만, 경제적․사회적 권리의 침해는 급여를 주지 않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부작위’는 ‘작위’로써 손상을 가한 것만큼 중대한 권리침해이며 거기에는 어떤 도덕적 차이도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권리’ 이론가들은 인간의 삶에는 인식 가능한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특징이 있으며, ‘보편성’과 ‘도덕적 타당성’이 두개의 주요한 기준이라고 본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합리적인 행위를 할 능력과 도덕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행위의무는 단순히 ‘권리행사의 보류’ 또는 ‘부작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부작위에 대해서도 인과적인 책임이 있다.
예를 들어 원조를 받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아동의 죽음이 방치되었다면, 그 아동이 어떠한 계약의 권리도 가지지 못했지만, 인간은 인과적으로 부작위에 대한 책임이 있다. 적극적 권리를 주장하는 이론가들은 이를 준 계약적인(quasi-contractual) 관계라고 본다. 왜냐하면 합리적 행위에 대한 능력과 도덕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명백한 계약을 넘어서서 ‘행위’할 ‘적극적’인 의무가 있다. 적극적 권리가 소극적 권리보다 자원이 더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권리실현을 위해 요구되어지는 자원에 대한 판단과 선택도 인간의 이런 보편적 ‘가치’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인권은 상호의존성과 불가분 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인권의 범주를 이분법으로 나누어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를 이차적이고 점진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볼 이유는 없다. ‘휴식, 여가, 합리적인 노동시간의 제한, 급여를 지급 받는 정기적인 휴가’에 대한 권리는 충분히 인정된 기본적 권리이고 이에 대한 부정은 인간존엄성에 대한 부정으로, 19세기의 통제되지 않는 자본주의의 가장 억압적인 특징들로 나타난 바 있다. 노동에 대한 권리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권만큼 중요하며, 장기간 강제된 실업의 심리적. 육체적 .도덕적 영향은 언론이나 종교의 자유에 대한 부정만큼이나 혹독할 것이다.
예컨대 노동자들이 자신의 시민․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곳에서야 자원과 수입의 공정한 분배나 빈곤으로부터 해방될 경제적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발전이 사회권보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며, 독재치하에서 기초된 경제발전체제가 국민참여의 배제, 즉 시민․정치적 권리의 억압임과 동시에 사회권의 보장을 위협하는 요소임을 나타내는 예를 우리 나라의 상황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는 인권의 국제체제 속에서 권리의 ‘전체성(totality)’속에 수용된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기본적 권리의 내용들이며, 이는 최근의 국제적 논의 속에서 재차 확인되고 있다. 즉, “인권에 관한 아․태 지역 비 정부조직선언(1993.3.27, 방콕)”, “아시아국가대표들의 방콕선언(1993.4.2, 방콕)”, “비엔나선언 및 행동계획(1993.6.25)”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바는 ‘인권에 관한 종합적이고 통합된 접근의 요구’이며, ‘경제․사회․문화적․시민 및 정치적 권리들의 상호의존성과 불 가분성 그리고 모든 범주의 인권들이 동등하게 강조될 것의 재확인’이다.
류은숙(참여연대 인권운동사랑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