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회관이 없는 대학교.
얼마 전까지만해도 밤10시만 넘으면 강의동 불이 꺼지고 수돗물이 끊기고 현관문이 잠기던 학교, 이곳이 바로 성남에 위치한 경원대학교(총장 김원섭)이다. 전교생 7천여명의 학생들과 학교당국의 싸움이 벌써 5년을 넘어서고 있다. 최근 들어 2명 제적, 6명 무기정학 등 중징계, 7명 고소-고발이 내려진 상태이다. 이어 지난 3월14일에는 경원대생 2백48명이 김원섭총장과 이석규 학생처장을 수원지검 성남지원에 고발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22일로 고 장현구 씨 분신사망 1백일 째를 맞는다. 아직까지 시신 안장조차 하지 못한 채 경원대 사태는 안타깝게도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질 않고 있다.
지난해 12월 분신-사망한 장현구(당시 27세 경원대 제적)씨의 죽음은 그저 한 젊은이의 죽음이 아니다. 92년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그는 학내 문제로 학교측이 학생회간부 10여명을 폭력, 방화, 업무방해 등으로 고소-발하고, 50여명을 무더기로 중징계 할 때 고소 등 징계조치를 당했다. 또한 같은 해 성남경찰서에 연행되어 불법수사를 받았고, 그뒤 감옥에서 정신이상증세를 보여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으며,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건 발생직후 성남지역 재야단체와 경원대 총학생회, 동문들을 중심으로 「사학비리, 경찰고문 희생자 고 장현구군 장례대책위원회」(위원장 이해학 목사, 장현구대책위)를 꾸려 진상규명과 고문경찰, 당시 장씨를 폭행한 교수들의 보직해임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간다.
학교측의 대화회피
장현구대책위는 곧바로 학교측과의 대화협상에 들어가지만, 학교당국은 “장씨의 죽음은 이미 제적 학생의 죽음이므로 학교측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보이며, 어이없게도 입시원서 접수기간중 장씨 사건 홍보로 피해를 입었다며 협상을 거부하고 나섰다. 팽팽히 맞서가던 2월말 학교측은 김문홍 씨등 6명을 감금과 업무방해 등 혐의로 고소하고, 상벌위원회를 통해 위영석 씨등 2명을 제적하고, 6명을 무기정학 등 중징계 한다. 이때부터 장현구 씨의 분신사망으로 시작된 싸움은 ‘징계-> 고발-> 구속’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밟게되고 화해와 협상이 어려운 지경으로 치닫게 된다. 이 사태를 보다못한 학부모들이 3월 ‘경원대학교 징계, 고발, 수배, 구속 학생 학부모 모임’을 만들었고, 성남지역단체를 중심으로 ‘경원대 사태해결을 위한 중재위원회’가 구성될 예정이다.
학교, 고발-구속조치
한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는 경원대사태에 대해 총학생회측은 ‘늘 써오던 방식’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82년 단과대학으로 출발, 5년만인 87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해온 경원대 내부는 곪을대로 곪아 버렸다.
경원대 학원자주화투쟁은 5년전인 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학기 등록금투쟁을 시작으로 학생회측은 학원자주화투쟁의 긴 싸움에 들어선다.
당시 7대 총학생회는 대학생활협동조합 건설, 총학생회 등록금 자체수납투쟁을 주장했고, 70%이상 학생들이 수납투쟁 참가하면서 결과적으로 등록금 3%를 학생복지기금으로 적립하게 되는 성과를 따낸다. 그러나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등록금 수납과정 수납등록금의 처리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학생들의 불신이 쌓이고, 그 불신은 그대로 8대 총학생회 선거 패배로 나타나게 된다.
91년 등록금투쟁 계기
‘백색’의 8대 총학생회는 등록금문제 해결과정에서 지난 학기 학원자주화 투쟁의 성과였던 복지기금 3%를 날려버린다. 결국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그 해 6월 제9대 총학생회 선거를 치르게 된다. 그리고 92년 총학생회 산하 상설적 특별기구로 제1기 학원 자주화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무더기 중징계조치가 내려지고, 꼭두새벽 학생처장과 보직교수, 직원들이 경찰을 대동하고 각급 학생회를 습격해 수배자 사냥에 나서는 지경에 이른다.
93년 1학기 총학생회는 고소-고발, 제적철회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지만 지지부진하다가, 4월 들어 경원전문대 입시부정과 경원대 교수채용비리가 언론에 드러나게 되면서 재단측의 심각한 타격을 가져온다. 결국 학생회측의 요구안 전체가 받아들여지고, 고소-고발조치 철회 및 간부들에 대한 징계철회라는 성과를 남기고 정리된다.
94년 2학기 들어 신임총장으로 김원섭 씨가 들어서면서 교수, 학생간의 합의서가 파기된다. 결국 지난 성과물인 대학생활협동조합이 파기-폐쇄되고, 학내단전 및 취사금지에, 경기동부총련 사무실을 걷어내기까지 한다.
학교측 약속 일방적 파기학생회측은 95년 1학기 들어 대학생활협동조합 재건과 재단전입금 확충을 요구하며 등록금 투쟁을 벌인다. 1백8명의 복적투쟁에 4천여명이 넘게 참가하고, 총학생회 간부들은 삭발투쟁 등으로 사기가 고양되지만, 학교측은 또다시 소강국면 때 민태호씨등 단대장 3인에 대한 징계-제적을 통보하고만다. 이렇듯 지난 5년동안 학교측의 무자비한 탄압과 고소-고발 사태, 간부구속 등으로 정체-답보상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95년 2학기 학교당국은 일방적으로 학부제 발표를 강행하고, 그해 겨울 또다시 단전조치를 취한다. 여기에 맞서 학생회측은 학원자주화투쟁의 국면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고 장현구선배의 분신소식을 듣게 된다.
학자 모색중 분신 접해
석달이 넘게 장현구 씨가 잠든 영안실엔 향내만이 가득하다. 농성 90일을 맞던 날 저녁 무렵 영안실엔 피곤한 몸을 누인 한 아주머니의 잠든 모습만이 보였다. 장현구 씨는 비록 제적당한 학생이지만 그의 죽음원인에 상당부분 학교측이 결부되어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올바른 이성과 진실한 마음으로 산적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만이 모두에게 남은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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