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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 ① '성남 외국인노동자의 집' 양혜우 사무국장

학생운동은 사향산업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말이 들린다. 그러면 사회운동은 무슨 길에 접어들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운동'이라 이름 붙여진 많은 일들이 예전처럼 활발하거나 뭇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진 못하다. "아직도 그런 일을 하냐"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묵묵히 제 일을 하고 있다. '음지에서 양지를 추구하는' 이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희망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다. 빌 게이츠가 그의 저서 『미래로 가는 길』에서 보여준 것이 과학문명의 발전을 통한 미래상이라면, 이들이 제시하는 길 역시 또다른 '미래로 가는 길'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인권하루소식>에서는 격주로 '인권운동의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을 찾아간다<편집자주>.

성남 시청 앞 번화가를 지나 좁다란 골목을 들어서면 풍경은 순식간에 산동네 한 귀퉁이를 옮겨 놓은 듯하다. 그 길을 따라가면 주민교회가 나오고 바로 교회 지하 한 칸 방이 성남 외국인노동자의 집(상담소) 사무실이다. 이곳은 낯선 나라에서 오갈데 없이 내쫓긴 이방인인 외국인노동자들에게 햇살 비취는 따스한 보금자리와도 같은 곳이다. 외국인노동자의 집과 양혜우 씨가 인연을 맺고 일하기 시작한 것은 상담소가 생기기 전인 93년 가을부터이다. 다섯 달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 성남 외국인노동자의 집은 생겨났다. 그때가 94년 4월10일.


차 밑에 들어가 연행저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지난 6월 5백여명의 전경이 네팔노동자 부부를 연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동차 밑으로 들어가 이를 저지했다는 것이었다. 꽤나 등치가 좋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기운 센 남자로 생각했다가 여성이라는 이야기에 스스로 가진 선입견에 창피했고, 바람에 날아갈 듯 연약하게 생긴 몸집에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었다.

누구나가 그 단체를 찾아가면 반드시 한번은 묻는 말이 있다.

"월급은 얼마에요? 재정은 어떻게 마련하나요?"

"94년 처음 문을 열 때는 한 달 운영비가 10만원도 안됐어요. 지금은 독일재단에서 상근자 월급(얼마전 월급이 올라 양혜우 씨가 70만원, 다른 상근자가 50만원을 받는다)을 지원 받고 있는데 그것도 올해면 끝나죠. 그밖에는 기독교장로회교회에서 후원을 받고 있는게 전부죠. 어쨌든 재정자립은 상담소운영에 있어 딜레마입니다". 문민정부 들어 변화가 있다면 운동단체에 대한 외국의 지원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눈부신' 외교정책의 성과로 선진국에서 한국을 더 이상 인권후진국으로 보지 않게 된 것이다.


남편과 친정어머니의 도움

상담소 상근자는 양혜우 사무국장을 포함해 3명. 그리고 자원봉사자 10여명이 바쁜 상담소 일손을 거들어 준다. 양혜우 씨의 출퇴근 시간은 따로 없다. 외국인노동자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든지 달려가야 한다. 쉬는 날이면 갈 곳 없는 외국인노동자들로, 성폭행을 당해 휴양을 필요로 하는 외국인 여성노동자로, 그를 보고 싶어 찾아오는 이들로 그의 집은 늘 가득 찬다.


가슴에 남은 외국인노동자

쉴 새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상담소 일은 휴일이 없다. 남들이 쉬는 일요일에는 병들고 지친 외국인노동자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의료봉사를 나온 의사들과 함께 40-50명의 노동자들을 맞기에 바쁜데, 상담소가 탄압을 받은 뒤 1/3이 줄어든 숫자이다.

치료를 받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담소가 생긴 뒤 치른 장례는 25건. 죽어서 만난 이들도 있지만 사고로 병원치료를 하던 중 숨진 이들의 얼굴과 체온은 아직도 남아 가슴을 아프게 한다.

"제가 만난 첫 죽음은 교통사고 당한 사람이었어요. 출국을 하기 전날 짐을 싸고 친구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10일 동안 그의 손을 잡고 함께 얘기를 나누며 쾌유를 기대했는데 죽었지요. 뇌사상태에 빠져 보호자로 된 상담소에서 그의 죽음을 결정해야되는 상황이었죠.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이예요." 병이나 사고로 상담소를 찾는 이들을 데리고 근처 병원갔는 데 치료가 불가능해 현대 중앙병원 등 큰 병원으로 옮기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치료비가 1천만원을 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다 보면 진이 쭉빠진다. 그 경우 헌혈증을 모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종합병원 원장을 만나 사정하면서, 그때마다 가까스로 고비를 넘겨왔다.


필연적으로 나서는 보호법 제정

아픈 사람은 수도 없이 밀려들고 일은 폭주하면서 상근자들은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외국인노동자보호법 제정운동은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지난 6월 구속되어 보석출감하기 까지 한달을 성동구치소에서 보내기도 했다. 사방이 막힌 방에서 한달 동안을 보낸 소감에 대해 그는 "처음에는 구속될 거라고 전혀 생각을 못했어요. 나 같은 피래미를 설마 구속하겠냐는 생각이였죠. 구속으로 나를 '그들이 무서워하는 구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기분이 좋아지던데요. 김목사님이 구속되고 나서 며칠동안 한 잠도 못 잤는데 피로가 팍 풀리더라구요."


서른한 살의 계획

그는 2년 전부터 남편과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어머니와 남편의 협조가 없으면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올해로 서른 한 살. 적은 나이는 아니다. 지금 당장 자녀계획은 일 때문에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면서 이어 덧붙였다. "남편과 결혼할 때 한 약속이 있어요. 우리 사회에는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은데 그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우리 세대에는 져야할 거라고 생각해요. 제 아이를 낳더라도 입양할 계획이예요. 형편이 된다면 3명 정도 키우고 싶은데, 안되겠죠?"

요즘 그녀는 새벽이면 회화학원에 다닌다. 외국인노동자 상담소에서 일하는 활동가로서의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외국인노동자를 대상으로한 교육과 다른 나라와의 연대를 통한 대처 방안마련 등이 필요한데 그러자면 어학은 필수로 나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외국인노동자의 유입은 자본의 이동과 마찬가지로 국경을 넘는다. 그녀가 하는 일은 이 흐름을 따라,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세상을 만드는데 자그만 흔적을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