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들의 다리가 되고자 하는 장애인 활동가
당연히 연구소 사무실이 2층일 거라는 생각으로 계단을 오르니 “지금은 우리 아이들이 잠을 자고 있으니 조용히 해주세요”라는 메모가 붙여 있고 바로 그 위에는 ‘장애아동가족지원센터’ 간판이 있었다. 한참을 헤맨 끝에 지하실에 위치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드디어 찾았다.
신용호(34) 씨는 언제나 처럼 맑은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필자는 그와 구면이었다). 언제 이사를 했냐는 물음에 지난 3월달에 충무로에서 오갈 데 없던 장애아동가족지원센터를 받아들여 50평인 사무실을 내주고, 지하방(70평)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며 “평당 1백만 원인데, 둘 합쳐 전세 1억4천만 원이니, 꽤 부자지?”하고 말했다. 장애아동가족지원센터에는 20명 가량의 정신지체, 자폐 아동들이 있다.
“장애인 올림픽이 열린 88년을 전후로 많은 장애인 단체들이 생겨났는데, 연구소도 87년 생겨나 88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지. 창립식엔 손님으로 갔었는데, 작은 단체 하나가 또 생겨나는구나 생각했어.”
연구소의 창립 목적은 장애인들의 요구를 수집․정리해 정책을 입법화시켜 내는데 있다. 서비스는 몇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밖에 없지만, 정책은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의 요구를 담은 목소리를 법, 제도 개선으로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장애아동가족지원센터 역시 이점에서 특수교육과 아동 복지, 사회복지를 접목시키는 실험의 장으로 삼고 있다. 이제껏 장애 아동을 대상으로 한 유치원 등은 교육에만 급급할 뿐 사회복지나 아동 복지 쪽으로는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이렇듯 현장과의 접목을 목적으로 준비중인 중요한 사업이 또 하나 있다.
사무실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직업평가실’이 그것이다. 장애인 취업문제해결을 위해서는 기초 데이터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중증, 정신, 지체 장애인 한 명 한 명마다 그 사람에게 적합한 직업을 분석해 내고, 필요한 곳에 배치해 내는 일이다. 직업평가실은 장애인 한사람마다의 직업․직무능력 평가뿐 아니라 이를 기초로 장애인 직종을 개발해 내고, 사후 관리를 통해 그 직업이 장애인에게 적합하지 않다면 재평가를 통해 다시 배치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직업만을 알선해 주는 ‘복덕방’의 역할을 하고 있는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 해야 할 바를 연구소가 하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미국에서 기자제를 들여와 기계 사용법에 관한 책자 번역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현장 요구 따라 사업 설정
연구소는 소장 1명, 부장 2명, 일반 직원이 11명으로 된 사단법인체이다. 업무는 기획․관리팀, 정책팀, 출판팀으로 나눠져 있고, 그는 기획․관리, 정책팀을 아우르고 있다. 과중한 업무로 5년째 계속되어온 장애우대학 준비를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이월할 작정이라고.
94년 12월 사단법인 등록을 하게 된 뒤부터 연구소도 변화를 갖게 되었다. 우선 월급이 일괄적으로 40만원이었는데, 지금은 그가 받는 70만원 가량의 월급과 300%의 보너스를 받는다.
방배동에 위치한 사무실 근처에 신혼 살림을 꾸렸다가 전세금을 올려 달라는 바람에 지금은 광명시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딸 가인이는 오는 26일이면 꼭 24개월이 된다. 부인과 인연의 끈을 맺게 된 것은 연구소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동국대 불교학과를 7년만에 졸업한 뒤 90년 1월 연구소에 들어왔다. 82학번 학교시절 장애인운동쪽 일이 바빠 몇 차례 휴학을 하는 바람에 졸업이 늦어졌다.
“괜찮은 줄 알고 들어왔는데, 왠걸. 총신대 근처에서 보증금 없이 월 13만원을 내고 살았지. 게다가 빚더미에 있더라구. 적어도 월간지 <함께걸음>은 자체 제작을 해내자는 생각에서 재정사업을 건의했어”
학교 시절부터 알던 후배를 통해 기획사를 인수하게 되는데 이때 기획사에서 일하던 부인도 따라서 연구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는 지체장애인인데 다른 장애인들처럼 결혼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김록호 원장이 운영하는 사당의원 봉투에서부터 외부에서 기획영업을 따오는 일이 그의 몫으로 낙착되었다. 그 뒤로부터 군대 3년 갔다온 셈치고 3-4년간 계속 영업사업 쪽에서 활동했다.
3년 넘게 영업 활동
시간을 지나며 연구소는 당초 세운 계획대로 입법 운동에 있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89년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장애인복지법 개정. 94년 특수교육진흥법 제정. 최근 장애인기본법에 이르기까지. 이밖에도 장애인복지관, 특수학교 건립 반대 싸움 등 연구소의 숨은 노력은 곳곳에 배여 있다. 연구소는 앞으로 사업 영역을 넓힐 부분으로 현장과 직접 연결되는 사업을 잡고 있다.
동국대 불교학과를 다니면서 장애인운동단체 ‘울림터’를 만들고, 전국지체부자유대학생연합회 활동에서부터 올곧게 한길을 걸어온 그가 이야기하는 장애인 운동은 이렇다.
“우리 사회에 있어 장애 운동은 그 개념조차 정립되어 있지 않다. 단지 내가 장애인이니까, 나는 특수교사니까 하는 식으로 아직 맹아적 단계에 불과하다. 장애인의 80%가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70%가 직업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장애 종류도 지체, 청각, 시각, 정신지체 등등 다양하다. 하물며 같은 청각 장애인이라도 그 장애 정도에 따라 욕구가 다르다. 이렇게 천차만별인 조건 속에서 공통분모를 찾는다는 것은 어렵고, 따라서 조직화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엘리트 중심이나, 장애인 시설장 중심의 청원운동이 되고 만다. 아직도 장애인의 권리보다는 심정에 호소하는 데 그치고 있다. 하지만 조건은 좋아지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자원활동모임이 많아졌다. 대학내 수화동아리의 경우 1백여 개가 넘는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과 함께 활동가는 모름지기 ‘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부지런히 현장을 뛰어다니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