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 위기 강타, 노동3권 후퇴
노동기본권에 대한 문민정부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군사정권과 차별성을 갖지 못했다.
군사정권의 ‘선성장’ 논리 대신 세련된 ‘국제경쟁력 강화’로 포장이 바뀌었을 뿐, 오히려 ‘고용불안 확대’와 쟁의행위를 제한하는 ‘노동법 개악’ 등은 노동기본권의 대폭 후퇴를 의미했다. 이러한 문민정부의 노동인권정책은 ‘고통분담론’으로 출발한 뒤 96년 ‘노동법 날치기 처리’를 통해 그 절정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반노동․친자본 성격이었던 문민정부로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허리조르기에서 목자르기로
경제적 압박과 생존의 위협은 노동자들이 겪는 최악의 고통이다. 이러한 고통은 문민정권 초기 ‘허리띠 조르기’로부터 후기 ‘목 자르기’에 이르기까지 문민정부를 관통하며 이어져 왔다. 문민정권이 출범하자마자 거창한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던 ‘고통분담론’은 결국 노동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고통전가로 귀결되었다. 매년 정부는 물가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억제 정책을 펼쳤으며, 노사자율 원칙에 위배되는 임금가이드라인마저 95년 다시 등장했다.
차라리 임금의 동결은 견딜만했다. 96년 이래 몰아닥친 ‘명예퇴직’과 ‘정리해고’의 열풍은 고개숙인 아버지를 양산함과 동시에, 사회전반에 ‘실업의 공포’를 확산시켰다. 정권초기 2% 수준이던 실업률은 97년 상반기에 이르러서는 무려 3% 선까지 증가했다. 또한 외주하청과 파견근로자 등 용역계약이 증가하고, 임시․촉탁․시간제 취업 등 비정규 고용형태가 증가함으로써 노동자의 고용불안은 한층 가중됐다.
그러나, 사회전반의 고용불안과 그로인한 자살 및 가정파괴 등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문민정부는 오로지 ‘노동시장의 유연화’정책만이 ‘국제화’에 발맞추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급기야 노동법에 정리해고를 명문화하는 ‘96 날치기 처리’를 통해 노동자들의 격분을 초래하기도 했다. 물론, 95년 고용보험제를 도입함으로써 실업․취업문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명시한 것은 현 정부의 공로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제도 역시 적절한 사회보장제도로 평가되기엔 턱없이 빈약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자가당착인 ‘국제화’ 논리
경제적 생존권 못지 않게 소중한 노동자의 권리는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권리이다.
이 가운데 그나라 노동인권의 수준을 재는 척도는 특히 단체행동권의 보장 여부인데, 이 점에 있어서도 문민정부는 반인권적인 종전 군사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닮고 있다. 93년 현대계열사의 공동임투, 94년 철도와 지하철 파업, 95년 현대자동차와 영남대의료원 파업 등 각종 노동쟁의에서 문민정부는 사전개입 또는 적극적인 공권력 투입으로 일관했다. 특히 정부는 95년 한국통신 파업 당시 이를 ‘국가전복세력의 음모’로 규정하며, 조계사와 명동성당에까지 공권력을 투입함으로써 노동기본권에 대한 후진적 인식을 극명하게 드러내주었다.
또한 노동자의 사회적 권리에 대한 문민정부의 시각은 ‘국제화’ 논리에 비추어봐도 자가당착적이다. 국제노동기구와 유엔인권이사회 등 각종 국제기구들은 △복수노조 허용 △교사공무원의 단결권 보장 △3자개입금지조항 철회 △노조의 정치활동 보장 등을 누차에 걸쳐 한국정부에 권고하고 시정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일례로 95년 7월 유엔인권이사회가 한국정부에 3자개입금지조항의 철회를 요구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정부는 그해 11월 권영길(민주노총 위원장) 씨를 3자개입 혐의로 구속함으로써 국제사회의 권고를 민망케했다. 심지어 96년 OECD 가입후 노동법을 날치기 처리한 것은 국내 노동자들의 거센 저항 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강한 비판마저 초래했다. 문민정부의 금과옥조인 ‘국제화’논리도 ‘노동시장 유연화’에는 적용되고 ‘국제기준에 맞는 노동권 개선’이라는 원칙에는 적용되지 않는 이중잣대였던 것이다.
‘파업권’ 대폭 제한
97년 3월 개정된 노동법은 현 정부의 노동권 이해수준을 재삼 확인시켜주고 있다. 개정 노동법은 △무노동무임금의 명문화 △대체근로 허용 △사업장내 주요시설 점거 금지 조항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등 노동조합의 활동을 현저히 축소, 제한하는 조항들을 곳곳에 삽입하고 있으며, 국제적 관심사였던 교원․공무원의 단결권을 또다시 배제하고 있다.
노동기본권이 ‘문민’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레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김영삼 정부 5년은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