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 오후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서울대에 모여서 제6기 한총련 출범식을 가졌다. 뒤늦게 학생들의 집회를 알아차린 경찰이 병력을 증강시키고, 서울대 항공에 경찰헬기가 뜨고 해서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팽팽했지만, 학생들은 서둘러 출범식을 마쳤고, 경찰도 무리하게 병력을 투입하지는 않아서 우려했던 불상사는 없었다고 한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보도에 따르면 이날 경찰은 학생들의 동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허를 찔렸다고 한다. 분풀이라도 하려고 해서 그랬을까. 출범식 다음날 벌어진 서울역 집회와 명동 집회 등에서는 학생 5백여 명을 연행했다고 한다. 그래도 심하게 다치거나 상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작년 한양대, 재작년 연세대에서 벌어진 공방을 생각하면서 가슴을 쓸어 내렸다.
잘못된 판결이긴 하나 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결받았는 데도 굳이 '한총련'이란 이름을 고집하고 있고, 대중성을 결여한 관성적인 운동을 되풀이하는 한총련에게도 할말이 적지 않지만 한총련에 대한 공격적인 비판이야 주류 언론이 언제나 반복하는 일이니 오늘은 한총련의 맞상대쯤 되는 경찰을 비롯한 공안세력에 대해서 몇 마디 하고 싶다.
대통령의 '한총련'관
내가 만나 본 대통령은 학생운동에 대해 매우 균형잡힌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한총련이 반보쯤 대중들에 앞서가다가 대중이 따라오지 않으면 잠시 기다리는 여유와 지혜를 지니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다. 그렇지만, 학생운동가들이 순수하다는 것과 조국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또한 그동안 민주화운동과정에서 학생운동이 많은 공헌을 했다는 점도 인정한다고 대통령은 말했다. 96년 연대사태를 두고서도 공안세력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우를 범했다는 지적만 했을 뿐이었다. 내가 아는 한 대통령은 학생운동이 지닌 몇몇 오류에 대해 걱정할 뿐, 적어도 학생운동과 운동가들을 때려잡아야 할 적으로 규정하지는 않고 있다.
2년 넘게 학생운동이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지만 86년 건국대 애학투련 사건으로 대규모 검거사태가 있고, 언론과 정부와 법원이 학생운동에 시뻘건 덧칠을 해댈 때도 학생운동은 심히 우려할만한 지경에 처했지만, 뼈를 깎는 각성과 진지한 변화모색을 통해 그 다음해에는 6월항쟁이라는 빛나는 금자탑을 쌓을 수 있었다. 학생운동에는 자정의 능력이 있고, 그럴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영남대에서 예정되었던 대의원대회를 연기한 것이나, 출범식을 싱거울 정도로 전격적으로 치른 것은 학생운동이 변화발전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다.
예전에는 한국을 움직이는 세력이 군부와 학생운동밖에 없는 것으로 비쳐질 때도 있었다. 누르는 군부의 힘이 강할수록 이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힘도 상대적으로 강해 보였다. 그렇지만 지금 실정은 어떤가. 수십 개 총학생회가 한총련 개혁을 요구하며 이미 탈퇴하였고, 포스트모던한 대학분위기와 학생운동은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고시공부를 위해서나 재미나는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천명이건 2천명이건 간단하게 모이지만, 아무리 중요한 사안이라고 해도 학교마다 1백명이 모여 집회를 갖는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학생운동이 그동안 힘겹게 떠맡았던 민주주의를 위한 짐은 다양화되고 조직화된 여러 갈래의 운동으로 이미 전이되었다.
왜 유독 한총련인가?
그런데도 왜 공안세력은 별 영향력도 없는 한총련에게만 유독 시퍼런 탄압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가. 노동절 집회에 작정하고 200개쯤 되는 쇠파이프를 들고 거리로 나와도 그것 가지고는 정부전복은 고사하고, 고용안정이나 재벌개혁도 이룰 수 없는데, 우리 나라가 그까짓 물리력으로 어떻게 될 정도로 허약하지 않은데, 50년만의 정권교체로 등장한 정부가 학생들 수백 명이 모여 '김영삼 처벌', 'IMF 재협상' 따위의 구호를 외친다고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왜 공안들은 학생들을 못잡아서 안달인가.
민주노총이 집회. 시위. 농성을 위해 명동성당을 찾아오면 어김없이 무장한 경찰병력이 성당 주변을 겹겹이 에워싼다. 그런데 경찰은 민주노총 지도부나 노조원들이 성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병력을 풀어놓지는 않는다. 경찰들에게 물어봐도 쉽게 알 수 있지만, 한총련 학생들이 명동에 들어와 하려고 하는 '노학연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병력을 운용한단다. 정말 진지하게 다시 묻겠는데, 한총련은 그토록 위험한가. 노동자들의 집회에 참석하는 것도 안되고, 스스로 집회를 여는 것도 안되고, 컴퓨터 통신을 사용하는 것도 안되고, 거리 곳곳에서 솎아 내야할 정도로 참으로 그토록 학생들은 위험한가.
요즘 들어 개혁의 주체가 없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대통령 혼자 개혁적이지 일선은 요지부동이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들린다. 공안들의 '한총련 끝까지 죽이기'를 보면 대통령은 '바람 풍' 하는데 일선 경찰은 고집스럽게 '바담 풍'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한총련은 안된다'는 한총련 죽이기가 대통령의 뜻인지, 공안들의 독자적인 판단인지 알고 싶다. 혹시 공안들이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과시하기 위해 스스로 생각하건대 가장 만만한 적수를 찾아서 그토록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아닌가.
오창익(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