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 사건 판결, ‘검사 입증원칙’ 무시
최근 ‘치과의사 모녀살해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사법사상 또 하나의 오점으로 기록될 듯하다. 이번 판결이 형사소송법상 ‘검사의 유죄입증 원칙’을 깨뜨림으로써, 억울한 죄인의 발생을 막아야 할 사법부의 인권보호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95년 아내와 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치과의사 이 아무개 씨에 대해 1심과 2심 재판부는 각각 사형과 무죄라는 상반된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에 대해 대법원 형사2부(주심 이용훈 대법관)는 지난 13일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원심파기 이유에 대해 “범죄사실 증명은 반드시 직접 증거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논리와 경험칙에 합치되는 한 간접증거로도 가능하다”며 “간접증거가 범죄사실에 대한 완전한 증명력을 갖지 못하더라도 전체 증거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증명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면 범죄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같은 대법원 판결은 ‘검사의 유죄입증 원칙’을 무시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검사의 유죄입증 원칙’은 열 사람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단 한 사람의 억울한 죄인이 발생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형사소송법상의 대원칙으로, 검사가 제시하는 증거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경우에만 유죄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80%의 유죄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그 증거에 대해 단 30%의 합리적 의심이 든다면 무죄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이 원칙의 취지인 것이다.
무죄를 선고한 2심 재판부의 판결은 이같은 취지 아래 ‘합리적 의심의 여지’를 인정한 것이었다.
‘합리적 의심 여지’ 인정 안해
피고인측 변호인 김형태 변호사는 “대법원이 원심의 증거판단에 대해 합리적이지 않다고 밝히면서도, 검사측 주장에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예컨대, 이번 사건에서 혐의 입증의 최대 쟁점인 피해자들의 사망시간과 관련, △피의자 이 씨는 오전 7시 이전에 출근을 했고 △살인범은 시체를 욕조안에 넣고 불을 질렀으며 △이 씨의 집에서 연기가 발견된 시간은 오전 8시 40-50분 경이라는 세 가지 사실을 볼 때 ‘합리적 의심’의 여지는 충분하다는 것이 변호인측의 주장이다. 김형태 변호사는 “불을 지른지 1시간 40분만에 화염이 발견된 것은 피해자들이 살해된 시간이 이 씨가 출근한 뒤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2심 재판부가 인정한 ‘합리적 의심의 여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 채 “정황증거만으로도 유죄입증이 가능하다”고 판결함으로써 결국 피고측에게 무죄를 증명할 것을 요구한 결과가 됐다. 이는 각종 고문사건에 대한 법원의 일반적 판결과는 상반된 결정이기도 하다. 흔히 고문사건 재판에 있어 법원은 피고측(고문수사관)에게 ‘무죄입증’을 요구하기 보다, 원고측(고문피해자)에게 증거입증을 요구해 온 것이 상례였다.
김형태 변호사는 “대법원이 사건을 2년6개월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의심의 여지가 많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엄격한 증거가 없는 경우, 피고인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판결의 기본인데, 이번 판결은 사법사상 유례없는 참혹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 이후, 앞으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가혹행위나 수사관의 감에 의존하는 수사가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