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법안 강력 반대, 특별법 제정하라”
의문사 유가족들이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다시 한번 한 맺힌 눈물을 쏟았다. 이들은 정부가 최근 발표한 인권법안에 강력히 반대하고 ‘의문사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29일 ‘삭발식’을 가진 것이다. 정부와 여당이 발표한 인권법안으로는 이제까지 고대했던 ‘의문사 진상규명’은 암흑 속으로 묻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날 삭발한 유가족은 84년 군대에서 의문사한 허원근 씨의 부친 허영춘 씨를 비롯해 유가협 의문사지회 회원 7명. 87년 대우중공업에서 노조활동을 하다가 의문사한 정경식 씨의 모친 김을선 씨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삭발에 동참했다. “12년을 기다렸습니다. 야당이 집권당이 되고, 어용노조가 민주노조가 되는 그날이 오면 우리 아들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질 것이라 기대하며 기다렸는데… 50년 만에 정권이 바뀌었다고 법석을 떨지만 국회는 의문사에 대해선 입 한번 떼지 않습니다.” 그녀는 특히 삭발 후에도 정부가 의문사 진상규명을 외면한다면 이제 남은 일은 아들을 따라 죽는 것밖에 없다고 말해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이들은 정부의 기만적인 태도에 대해서 더욱 분노하고 있다. “대통령은 의문사 진상규명을 반드시 이루겠다며 이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국회에서 ‘의문사 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여당이 인권법안을 날치기로 확정했습니다. 인권법안을 한 번 보십시오. 억울하게 죽어간 여기 우리 아들들의 죽음을 밝혀낼 수 있는지 말입니다.” 삭발에 참가한 유가족들은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인권법, 진상규명에 한계
이번에 정부와 여당이 합의 발표한 인권법안은 △가해기관을 수사기관이나 정부기관으로 한정하고 △인권위원 3분의 2 이상이 수사에 동의해야 하며 △수사방법상 기밀 누설이 우려되는 것은 증언, 자료제출을 거부할 수 있고 △증인을 보호하는 제도가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의문사 진상규명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삭발식을 마치고 정부종합청사 앞으로 행진을 시도하던 이들은 경찰의 봉쇄로 인해 심한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유가족협의회 활동가의 옷이 찢어지고 유가족을 포함한 시위참가자 22명이 ‘닭장차’(전경 버스)로 들려 가는 불미스러운 일도 발생했다. 참가자들은 ‘국민의 정부’가 유가족들의 한을 풀어 주지는 않고 되려 가슴에 또다시 못질을 하고 있다고 정부의 비정함을 나무랐다.
강희남 목사는 “제주 4․3을 비롯한 모든 억울한 죽음에 대한 완전한 진상 규명이 없이 어떠한 개혁도 헛바퀴 돌리는 무의미한 일”이라며 정부에게 박정희․전두환 등 과거 군사폭력배들이 저지른 살해사건에 대해 낱낱이 밝혀낼 것을 엄중히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