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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양지마을의 형제들, 인권유린의 온상인 시설

폭로 또 폭로, 처벌은 시늉 뿐


“시설문제가 심각할 거라 생각은 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한다는 이유로 우월감에 빠져있는 시설운영자들과 그 밑에서 노예처럼 살고 있는 아이들, 그 모습에 몸서리가 쳐지더군요”

뿌렌나애육원 사건을 접했던 정성환(아산 YMCA 간사)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떠올린다.

작년 한해, 육지 위의 노예선 이라 불린 양지마을의 인권유린 폭로와 함께 이곳 저곳에서 원생 혹은 사회복지사들의 제보로 사회복지시설들의 실상이 알려지는 일이 잦았다. 정 씨의 말처럼 국민들은 몸서리 쳐지는 충격을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설의 이름만 달랐지 사안과 대응방식은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뿌렌나, 동암, 에바다…

“대통령 아저씨, 정말 아이들을 사랑하고 덕이 있는 원장과 이사장을 보내주세요. 그래서 이곳 아이들이 ‘어린이 헌장’에 나오는 권리를 제대로 누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뿌렌나애육원에서 보육사로 근무하던 이순아(30) 씨는 지난해 9월 시설 내 아동 학대와 비리를 고발하기 위해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간 수 없이 아산시청에 실태를 알리고 철저한 감독을 요청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씨의 청와대 탄원서에 자극 받았는지 아산시는 때늦은 감사를 실시해 김창선 이사장과 차동춘 원장이 시설 건물의 임대수익금을 가로챈 혐의를 포착했다. 1년이 지난 지금 뿌렌나애육원은 관선이사의 파견, 시청의 감독 강화 등으로 일면 변화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시설비리를 고발한 이 씨 등 보육사들은 시설의 위신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강제 해고됐다. 원생들에 대한 강제노역, 성폭행 의혹 등 대표적인 문제들은 무혐의 처리돼 김 씨 등은 수익금 횡령부분으로만 기소된 상태이다. 이들은 관선이사의 임기만 끝나면 언제든 다시 시설로 복귀할 수 있다. 시설 비리를 알면서도 눈감아줬던 아산시 공무원들 역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전주를 떠들썩하게 했던 장애인복지시설 동암재활원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회복지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까지 받은 양규복 이사장은 부인 박순자 씨를 원장으로 내세워 편법증원 등을 통한 정부 보조금 횡령, 원생들에 대한 성폭행 및 상습구타 등 온갖 비리를 저질러왔다. 이 사실은 한 원생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져, 시의회가 특위를 구성해 진상조사에 착수했으며 지역시민단체도 대책위를 구성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성폭행 가해자가 구속되고 원장이 바뀌었다. 하지만 동암에 변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신변의 위협을 무릅써가며 동암의 비리를 폭로한 원생 김경택(34, 뇌성마비 1급 장애) 씨에 따르면, 양 씨는 어떠한 사법적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여전히 이사장 직을 수행하고 있다. 사건 발생 후 폭언은 여전하고 폭행 혐의롤 받고 있는 교사들도 아직 동암에 남아있다. 오히려 동암 원생들은 이전보다 더한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을 뿐이다. 이에 김 씨는 “비리가 드러났는데도 왜 처벌하지 않느냐”며 울분을 토한다.


비리 드러나도 처벌은 시늉

시설비리척결과 최성창 전이사장 일가의 완전퇴진을 요구하며 천 일에 가까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에바다 농아원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에바다 농아원들은 지난 96년 시설 내비리척결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이후 검찰수사와 행정기관의 감사로 원생들에 대한 강제노역과 임금착복, 인건비 이중수령, 보조금 횡령 등의 비리사실이 드러나 최 전 이사장과 최실자 전 원장 등이 구속됐다. 대통령이 문제해결을 세 번이나 공식적으로 약속했고, 이성재 의원(국민회의)이 관선이사로 파견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 싶었다.

하지만 구속됐던 재단 운영자들이 재단운영에 복귀하면서 문제는 이어졌다. 최 전이사장의 동생 최성호가 에바다 농아원 교장으로 취임했고, 최 전원장 등은 에바다 내부운영에 깊숙이 관여, 공금 등을 착복해오고 있다. 비리사실을 폭로해 파면된 교사들에 대한 교육청의 복직명령도 이행되고 있지 않다. 더욱이 지난 6월에는 최 전이사장을 복직시킨다는 내용의 이면합의서가 발견돼 에바다 문제 해결이 시늉에 불과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평택시청 사회복지과 이일수 씨는 이면합의서에 대해 “관선이사 파견으로 에바다가 정상 운영된다면 기존에 운영하던 사람들에게 운영권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또한 “현 에바다 운영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에바다 농아원생들은 아직도 평택역에서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폭로의 끝은 제자리

여기서 하나같이 발견되는 현상은 정부의 역할과 의무의 부재이다. 강제노역과 임금횡령, 원생에 대한 성폭행과 성추행, 정부보조금 또는 기부금횡령 등 그 정도를 넘어서는 시설 비리와 인권유린은 정부의 감시와 감독에 의해서가 아니라 ‘폭로’에 의해 드러났다. 폭로된 이후에도 정부의 싸고돌기와 해결의 시늉은 계속되어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형식에 그치고 있다. 그리고 인권유린의 주범들은 언제든지 시설로 상징되는 자신들의 왕국에 복귀할 기회를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문제는 시설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방임과 책임회피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이유로 시설문제의 폭로는 문제해결로 가는 다리가 아니라 절망적인 현실을 확인시켜 주는데 머물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