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가 강의 시간에 늦었다. 시내버스 기사와 시비가 붙는 바람에 늦었다고 해명을 했다. 정류장에서 미처 내리기도 전에 버스가 출발을 했고, 교수가 이를 항의하면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기사는 '왜 문 앞에 미리 나와 있지 않았느냐' 소리를 높였고, 이 교수는 '차가 완전히 서고 자리에서 일어 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을 받은 것이다. 여전히 분이 안 풀린 듯 씩씩대며 교수가 한 마디 덧붙였다. 이건 우리의 존엄성을 지키는 싸움이라고. 프랑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내릴 정류장이 가까워 오면 바짝 긴장하고, 한 정류장 전쯤에는 문 앞에 나가 대기하고, 차가 서면 신속하게 내린다. 가끔 늑장부리다 기사에게 한 소리 듣는 사람을 보면 얄미운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니 이 교수의 말이 조금은 불편하게 들렸던 것이 사실이다.
'작은 일'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거 아닌가, 사태를 너무 단순하게 보는 거 아닌가 하면서 속으로 공연히 어깃장을 놓기도 했다. 무엇보다 '프랑스' 운운한 것이 거슬렸다.
며칠 전, 신문에서 한 페미니스트의 칼럼을 읽다 문득 그 때 일을 떠올렸다. 그 칼럼은 386 의원들과 한 환경운동가의 행태를 '여성이 빠진 진보'의 당연한 결과라고 했다. 그 칼럼의 한 대목. "남성들에게는 은밀한 일상이었을 이 일련의 사건들은 '여성의 눈'에 의해 인지되고 알려지게 된 것이다."
남성들의 성문화에서는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들, 그래서 이념적으로는 진보적인 사람들도, 생명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강하게 외치는 사람도 남성이기 때문에 보고 느낄 수 없는 '어떤 것'은 오로지 여성이라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만 포착된다는 것이다.
'프랑스'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서구' 혹은 '문화제국주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권의 선진국'이라는 것이다. 아마 그 교수와 나는 서로 다른 쪽 의미를 사용했을 것이다. 프랑스 유학을 한 교수의 용법과 한때 제국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웠던 나의 용법이 달랐던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즉자적인 감정을 다스리고 다시 생각해 볼 때, 인권 선진국으로서 프랑스라는 '타인의 시선'이야말로 우리의 둔감한 인권의식에 따끔한 자극을 주는 가시가 되리라는 점은 선선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도 내릴 정류장이 가까워 오면 긴장하고, 한 정류장쯤부터 문 앞에 나와 대기하다가, 차가 서면 신속하게 내린다. 그러나 늑장을 부리는 사람을 탓하지는 않는다. 조금 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서, 차가 완전하게 선 후 천천히 내리는 모험(?)도 해 볼 생각이다.
박복선 (우리교육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