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정책기조 맞서 공공성 강화로
지난 11일 정부와 의약계가 약사법 개정에 합의했다. 그러나 국민 의료권의 강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번 합의가 당초 의약분업의 취지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데다, 의․정 간의 힘겨루기를 거치면서 오히려 의료공공성이 후퇴되는 상황마저 예고되고 있다.
의사집단 내에서 이른바 '왕따'를 당하면서도 의료개혁의 입장을 유지해왔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우석균 기획실장을 통해 의료개혁의 과제를 짚어보았다.
미완의 의약분업
당초 의약분업을 통해 기대됐던 것은 의사들로부터 투약권을 뺏고 약사에겐 처방권을 뺏음으로써 처방과 투약과정에 '이윤동기'가 개입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즉 '약값마진'에 대한 유혹 때문에 '올바른 의료행위'가 뒷전으로 밀리지 않도록 하면서, 의료의 공공성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합의안이 부족하나마 과거보다 진일보한 것은 사실이다.
"개원의의 반수 정도가 정부에 고용된 공무원처럼 됐다. 제도외적으로 먹고살던 의사를 제도 내로 포괄하게 된 것이다. 취지가 훼손되긴 했지만, 지금의 의약분업 내용이라도 지키는 것이 진보다."
그러나, 이번 약사법 개정안은 '약값마진'에의 유혹과 그에 따른 제약업계․의사․약사간의 담합통로를 열어두고 말았다. 약효동등성에 대한 검사없이 의사가 특정약품을 처방할 수 있기 때문에, 가격마진이 높은 약품만을 담합판매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의약간의 담합을 견제․감시할 수 있는 시민단체의 참여(의약협력위원회)가 완전히 배제되었다. 미완의 '의약분업'인 것이다.
민간의료보험 도입 예고
의약분업이 후퇴한 것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앞으로 보건의료부문의 공공성이 더욱 훼손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선 의약분업 논란과정에서 세차례에 걸쳐 수가가 인상됐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될 전망이다. 정부가 수가인상분을 의료보험료의 인상을 통해 해소하려들기 때문이다. 만일 보험료 인상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질 경우, 정부는 '민간의료보험 도입'이라는 카드를 꺼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민간의료보험의 도입은 이미 물밑에서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기조를 고스란히 보건의료부문에도 관철하는 것이다.
"정부는 보건의료에 돈을 쓰려하지 않는다. 교육마저 사교육화하는데 보건의료부문은 말할 것도 없다. 정부는 수가인상에 맞추지 못하는 공백을 다시 시장에 돌리려 할 것이다. 그것이 민간의료보험제도다. 보건의료부문을 시장에 내맡긴다는 것은 WTO협정 속에도 이미 들어있는 내용이다."
"외국의 초국적자본들은 이미 국내 보건의료부문 진출을 도모하고 있고, 민간의료보험제가 시행되면 곧바로 쳐들어올 태세다. 규제개혁위원회는 보험자단일조항(건강보험공단으로 의료보험을 일원화하는 것)의 삭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외국의 초국적자본 뿐 아니라, 정부의 경제관료들, 의료시장주의자, 재벌병원 등이 이해를 같이하고 있다. 칠레의 경우 전국민의 12%가 민간의보에 가입했다. 그 결과, 공공의보는 몰락했고 대다수 국민들이 의보혜택을 받지 못하게 됐다."
정부지출 도리어 확대해야
이 시점에서는 도리어 국가의 부담을 늘리고, 의료보장혜택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 우석균 실장의 주장이다.
"정부가 매년 1조1천억원만 투자하면 된다. 이 비용이면 지역의보 재정의 50%를 감당할 수 있고(현재는 26%), 국민들은 1년에 50만원까지만 의료부담을 지고, 나머지는 모두 국가가 부담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의료보장혜택을 모든 의료의 90% 수준까지 획기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OECD Health Data 2000)에 따르면, 전체보건의료지출 중 공공부문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에 있어, 우리나라는 29개 가입국 가운데 97년 최하위(40.6%), 98년엔 조사대상 27개국 중 26위(45.8%)를 차지했다(1위 룩셈부르크는 92%, 대부분 65-85% 수준).
한편 의료의 공공성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대학병원만 살고, 동네의원은 죽는' 현 의료제공시스템도 혁파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동종질병에 동종수가를 책정하는 포괄수가제와 주치의등록제 등을 실시함으로써 1차병원 중심의 의료제공시스템으로 만들어야만 의료의 공공성을 확대해 나갈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의료혜택의 주체인 국민 스스로 의료권에 대한 자각을 높여나가야 한다는 점이 관건으로 지적된다.
"노동자도 농민도 의료를 자기의 권리로 자각하고, 전체의료시스템에 대한 자기전망을 가져야 한다.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를 꾀해야 한다. 이는 국가권력의 성격과 관계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