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의 시대에 인권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인권은 민주주의의 산물이지만, 다시 민주주의의 현실에 의해 제약받게 된다. 인권은 그 내용이 자명한 듯하면서도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구체적인 맥락에서 인권은 항상 다른 권익과 충돌하며 또 다른 인권들과 경쟁하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민주주의 시대에 인권은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항상 민주적 심의(審議) 절차를 통하여 규정되고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어떤 정치체제보다 ‘공동체’성이 미약하다. 예전의 종교나 다른 이데올로기적 공동체는 일정한 이념과 가치로서 사람들을 결속시키고 인간의 지위에 관한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였다면, 민주주의는 개인의 존엄과 자율이 강조되는 반면에 공동체성은 약화된다. 민주주의를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언어공동체’ 혹은 ‘의사소통공동체’라는 측면에서 그럴 뿐이다. 그리고 인권의 바탕을 이루는 이념과 가치도 의사소통의 과정 속에서 대중의 언어적 표상과 또 무의식적 상징에 의하여 지배된다.
이처럼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언어공동체의 본질적 구성부분으로서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핵심적 인권이지만, 그것이 매체를 통하여 대중의 타성적 관념을 형성하는 차원에 이르면 그 자유는 위험하기도 한 것이다. 민주주의 시대에 언어와 의사소통의 이미지를 장악하는 자는 곧 인권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인권은 매체들에게 정복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언어철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언어와 실제(實際)는 항상 부합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가 실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때가 많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실제를 가리우고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 인권의 실제는 언어의 감옥에 갇히고 뿌리 없는 언어적 인권만이 춤을 추는 것이다.갈등과 증오를 부추기며 인권의 지반인 평화를 교란해 온 언론들이 마치 언론자유의 수호자인양 행세하는 것이나, 상품의 논리를 내세우며 인권에 치명적인 무분별한 폭력을 미화하는 예술인들이 자랑스레 표현의 자유를 구가하는 것을 보면서 현대 민주주의의 인권의 위기를 절감한다.
21세기 인권운동은 무책임한 언어와 허황된 이미지와의 투쟁, 곧 시민적 문화혁명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정태욱 (영남대학교 법과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