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가는 사람은 양심이 없다는 말입니까?"
양심적 병역거부 얘기가 나오면 자주 듣게 되는 불만 섞인 목소리다. 처음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참 난감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을 쓰면서 '병역거부'라는 구체적 행위에 초점을 맞췄을 뿐 '양심'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던 것이다. '양심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나의 양심은 어떤 행위를 용납하고, 무엇을 꺼리는가….'
먼저 든 생각은 양심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미 익숙해져버린 이분법을, 흑백논리를 버려야겠다는 것이었다. '군대 안 가는 사람이 양심적이라면, 군대 가는 사람은 비양심적'이라는 생각은 바로 이 흑백논리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양심에서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오히려 사람마다 다른, 자기만의 진실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하기를 꺼리는 일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양심의 문제는 출발한다. 양심의 다양성 그리고 그 차이에 대한 관용에서 타인의 양심을 존중하는 마음은 나온다. '60억 인류에게는 60억 개의 진실이 있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60억 인류에게는 60억 개의 양심이 있다.'
그런데 유난히 민감한 양심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감한 일에 "차마 그것은 하지 못하겠다"는 양심의 칼날에 찔리는 사람들이다. 준법서약서를 쓰지 못하겠다던 양심수들, 사람을 죽이는 전쟁연습에는 동참하지 못하겠다는 여호와의 증인들, 죽은 짐승의 시체는 먹지 못하겠다는 채식인들, 새만금 갯벌의 생명들이 죽어가는 소리에 귀 막지 못하는 생태주의자들…. 모두 우리 시대의 '양심적 소수자들'이다.
하루하루 이들의 양심은 결코 편치 않다. 우선 이들의 양심은 일상에서 끊임없이 심문 당한다. "준법서약서 한 장 쓰는 것이 뭐가 어렵냐?", "남들 다 가는 군대를 왜 못 가겠다는 거냐?", "먹을 것 가지고 왜 그렇게 유난 떠냐?" 이 사회의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던지는 질문들이다. 그런데 이런 말에는 묘한 공범의식이 배어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이런 질문들은 “나는 하는데 당신은 왜 못하느냐?"고 질책하는 은근한 다그침으로 들린다.
국가보안법으로 대표되는, 법이 양심을 단죄하는 사회에 살다 보니 어느새 우리들의 양심은 둔감해졌고, 남의 양심을 훼손하는 행위에 무감해져버렸다. 아직도 전체주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한 사회에서, 5천만의 양심들이 서로를 존중하기란 기대하기 어렵다. 양심적 병역거부권의 입법화에 발목을 잡고 있는 기독교계의 모습에도 그 그림자는 드리워져있다. 서로의 양심의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를 도모하는 관용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필요한 것은 무관심인지도 모른다.
(신윤동욱 씨는 <한겨레21>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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