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5일 유엔 사무총장의 결정에 따라 유엔의 모든 회의 일정이 축소된 가운데, 유엔인권위의 파행운영이 계속되고 있다. 이미 기존 일정에서 일주일 가량 회의가 지연됐으며, 일정조정으로 인해 국가별 인권상황에 대한 특별보고관 보고서 논의는 예년과 달리 특별한 쟁점 토론 없이 형식적으로 진행됐다. 또한 지난 3일부터는 정부대표, 민간단체대표를 포함한 참가자 전원의 발언시간이 30% 축소되었다. 정부의 경우 각 의제당 총 21회의 발언권 외에도 하루 4회까지의 반박권, 의사진행 발언, 외무장관 초청발언 등 여전히 발언의 기회가 많지만, 민간단체의 경우 단지 3분 30초 6회의 발언만이 허용된다(예년까지는 7분 6회).
이로 인해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제3세계 소규모 민간단체들이다. 이들의 경우 재정 등의 어려움 때문에 단기간동안 자국의 인권침해상황을 알리는데 가장 효과적인 '국가별 인권상황',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시민․정치적 권리' 등의 의제기간 동안만 참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들 의제는 일정지연으로 아예 시작도 못하고 있어, 어렵사리 참가한 제3세계 단체들은 귀국일정을 연기하거나, 활동을 축소하고 있다. 지난 주 수요일 인권위 의장과 민간단체간의 간담회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온 한 민간단체 대표는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발언 한번 제대로 못하고 돌아가게 생겼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일부 민간단체들은 '이번 인권위를 보이콧해야 한다'는 등 강력한 대응책을 주장하기도 하나, 대부분 '그러면 정부들만 좋아하게 될 것'이라며 수세적인 자세를 보였다. 한 활동가에 따르면 여러 민간단체들이 '각국 외무장관 초청연설' 등 회의 의제와 직접 상관이 없는 시간낭비들을 줄여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출했으나, 야쿠보르스키 의장(폴란드)은 "어떻게든 시간 내에 회의를 끝내는 것이 목표"라며 관료주의적 발상을 감추지 않았다.
발전권 논의, 저개발국-선진국 간 입장차 커
지난 주 진행된 발전권에 관한 논의는 올해도 뚜렷한 발전 없이 저개발국가와 고도성장국가 간의 뚜렷한 입장차이만 확인한 채 끝났다. 저개발국가들이 경제․기술 원조, 공정한 무역, 외채탕감 등을 통한 경제성장을 강조한 반면, 선진국들은 남-남 협력, WTO를 통한 자유무역 등을 주장했다.
남미국가를 대신한 발언에서 칠레대표는 "발전은 저개발국가들의 생산다양화를 통해 종속의 고리를 끊는 것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최저개발국가그룹'을 대표한 방글라데시는 "무역이 경제성장의 엔진"이라고 전제하고, "1960년대 2%에 달하던 최저개발국가들의 세계무역 참여정도가 2000년에 들어서 0.4%로 떨어진 것은 이들 국가의 주변부화 현상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강조했다. 수단은 이렇게 심각한 국가간 경제수준차를 줄이기 위해 '우루과이 라운드에 따른 무역자유화가 빈곤국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심각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일본 대표는 남-남 (저개발국가간) 기술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발전권의 논의가 남-북 협력에만 제한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주장해 제3세계에 대한 협력의 책임을 회피했다. 캐나다 대표는 "현재의 세계무역체제는 분명히 모두의 발전권을 위한 것"이라고 밝히는 등 WTO 협정에 따른 자유무역체제를 우월성을 강조했다.
발전권에 관한 논의 내내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 선진국들은 대체로 침묵을 지켜, 제3세계 국가들의 공허한 성토대회의 분위기였다. 또한 제3세계 국가들도 공정한 분배, 환경, 민주주의 등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관점은 없이 경제성장만 주장하는 한계를 보였다. 한편 우리나라 대표는 "2000년 2억 달러가 넘는 돈을 경제발전 지원에 투자했다"고 밝혀 국제무대에서 선진국의 대열에 들었음을 다시 확인시켰다.
국제통상법 인권에 어떤 영향?
2일에는 유엔인권위 회의장 주변에서 '경제적 세계화와 인권'에 관한 민간단체 전략회의가 열려 주목을 끌었다. 이는 세계루터란연맹, 국제고문반대기구(OMCT) 등이 주최한 것이다. 이날 회의의 주제는 가트(GATT), 지적소유권에 관한 협정(TRIPS) 등 WTO 체제 하의 국제통상법이 인권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주로 지난 2000년부터 인권소위가 시작한 '세계화가 인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작업을 평가하면서, WTO에 민간단체가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의 필요성이 강조됐다. 논의 중 한 민간단체 대표는 "WTO는 유엔보다 훨씬 민간단체에 비협조적이다. 특히 민간단체 이름에 '인권'이란 말만 들어가도 만나는 것을 꺼린다"고 밝혔다. 하지만 WTO도 국제통상법이 국제인권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에 부담을 갖고 있는 만큼, 국제인권단체들이 심포지움 등을 통해 견인해 내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데 대체로 동의했다. 한편 WTO가 소재한 제네바에 기반을 둔 국제인권단체들 간의 연대 방안도 모색됐다.
- 2065호
- 김철효
- 2002-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