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인권영화제'에서 <대지의 소금>이라는 작품을 본 일이 있다. 1950년 뉴멕시코 지방에서 벌어졌던 탄광노동자들의 파업을 소재로 한 극영화였다. 영화는 백인 소유 광산회사의 횡포에 분노한 멕시코계 광부들이 파업투쟁을 결행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러나 영화의 시선은 파업투쟁 자체에 머물지 않고, 파업투쟁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차별과 억압의 구조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바깥에서는 자본가에 맞서 싸우던 남성노동자들이 가정에서는 아내를 억압하는 모순, 남성들의 파업투쟁은 위대하지만 수도시설의 수리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하찮은 불평쯤으로 치부하는 독선을 보면서, 관객은 이중삼중으로 얽혀 있는 억압의 고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서 억압의 고리를 하나하나 끊어낸다. 법원의 파업금지명령에 발목이 잡힌 남성들을 대신해 피켓을 들고나선 여성과 아이들. 그들이 잠재되어 있던 자신들의 능력과 자존심을 발견해 가는 과정은 하나의 감동이다. 또 유치장에 끌려간 아내를 대신해 가사를 돌보던 남성들이 '수도시설'의 절박함을 깨닫는 장면에 이르러 관객들의 카타르시스는 절정에 달한다. 마침내 파업투쟁마저 승리로 끝나는 이 영화는 엔딩자막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시선을 붙잡아 둘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작품이다.
새삼 몇 해 전의 영화감상을 되씹어 보는 것은 영화 속의 뉴멕시코가 우리와 아주 먼 현실로 보이지 않아서다. 지난해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때나 올해 발전산업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때, 우리는 '가족대책위'라는 이름 아래 모인 '아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구속되거나 수배된 남편을 대신해 머리띠를 묶고 거리로 나섰던 그들은 뉴멕시코의 아내들보다도 더 치열하게 전투적으로 싸웠다. 그 남편들은 투쟁하며 쓰러지고 잡혀가던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며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리고 아내들은 투쟁 속에서 무엇을 남겼을까? 비록 파업을 승리로 마감하진 못했더라도, 그들이 '평등'과 '권리'의 새 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파업은 '승리'한 싸움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본다.
기름때 하나 묻히지 않으면서 노동운동과 파업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할 처지는 못 된다. 어줍잖게 들어보기론 파업을 흔히 '노동자들의 학교'라 부른다던데, 그것은 파업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깨닫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지의 소금>은 거기에 한 가지 메시지를 더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파업은 자신의 권리 뿐 아니라, 타인의 권리에 대해서도 학습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파업이 진정한 인권학교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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