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로부터 심한 고문', 피해자들 오랜세월 후 입 열어
1980년 4월 '사북항쟁' 관련자들이 군부에 의해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증언이 최근 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또한 이 다큐멘터리는 당시 광부들이 처했던 비인간적 상황과 항쟁의 성격을 재조명하고 있어, 이제껏 '광부집단난동'으로 왜곡된 채 잊혀져왔던 '사북항쟁'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재촉하고 있다.
지난 4월 제작, 6월 1일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된 이미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먼지, 사북을 묻다'에서, 관련자들은 20여년 동안 쉬쉬해왔던 고문 피해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북새마을사택 부녀회장이었던 김모 씨는 "수사관들이 젖통을 좌악 잡고 끌어올리고, 발길로 찼다"며 증언했다. 또 다른 한 여성 역시 "(수사관들이)홀딱 벗겨놓고 젖꼭지를 잡아당겨 다 비틀고, 겨드랑이 털을 뽑고 손을 묶은 채 발로 치고 패며 공 굴리듯 굴렸다"고 말했다. 손인숙 수녀는 "고문을 당한 여성들은 집에 돌아와 남편한테 그 사실을 얘기 못하고 자주 깜짝깜짝 놀랐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항쟁지도부였던 이원갑 씨는 고문으로 손가락․갈비․명치의 뼈가 이탈했고, 신경 씨는 왼쪽 고막이 파열됐다. 전효덕 씨는 "수사관들이 '이북에 넘어갔다 왔다'고 자백하라면서 수없이 두들겨팼다"고 말했다.
이러한 가혹행위는 처음으로 군부가 관련자들을 연행하기 시작한 80년 5월 6일부터 20일께 까지 계속됐고, 피해자들은 허위사실을 자백하거나 강요에 의해 관련없는 사람의 이름까지도 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박노연 씨는 "하지만 (수사관들이) 밖에 나가서 고문당했다고 말하면 쥐도 새도 없이 죽는다고 했다"며 여태껏 숨죽이며 살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비인간적 대우에 맞선 '노동자항쟁'
80년 4월 21일 당시 국내최대의 민영탄광인 강원도 정선군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광부와 그 가족 6천명은 들고 일어났다. 당시 동원탄좌 노동자들의 월 임금은 16만원(현재 41만원 가치)으로 최저임금에 못 미쳤다. 회사 구판장에선 280원짜리 소주를 350원에 파는 등 생필품을 시중보다 더 비싸게 팔았다. 수백 내지 수천미터의 지하 막장에서 일하다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당시 이재기 노조지부장은 적은 폭의 임금인상을 회사측과 담합하고 부정선거를 통해 지부장 자리를 유지해 노조원들의 반발이 거셌다.
이러던 중 회사측이 임금인상과 어용노조지부장의 사퇴 요구를 무시한데다 경찰차가 집회를 위해 모인 광부노동자 중 일부를 치고 달아난 것은 '80년 4월 사북항쟁'의 불씨를 당겼다. "못 배우고 무식하다고 우릴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이처럼 다큐멘터리는 관련자들의 증언과 자료에 근거해, 이 사건이 '집단난동'이 아닌 비인간적인 대우에 대한 광부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일어난 '항쟁'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 항쟁 나흘째인 24일 이들은 군부와 △어용노조 지부장 사퇴 △임금인상 등 11개 항에 합의하고 상황을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군부는 6월 5일께부터 마구잡이로 광부노동자들 및 주민들을 연행했고, 당시 택시기사였던 이희대 씨는 "광부를 검거하는 데동원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후 81명은 군법회의에 회부돼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 등으로 처벌을 받았다.
"폭도란 꼬리표, 이제 지워달라!"
"'폭도', '난동'이란 꼬리표 때문에 살아가는 데 지장이 많았다." 당시 이른바 '사북사태'를 주도한 혐의로 2년형을 살았던 신경 씨는 6일 말을 토해냈다.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일이었는데, 갖은 고문당하면서 형을 살고 나니 가정이 엉망이 됐고,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숨어살았다. 폭도란 단어는 이제 지워줬으면 좋겠다." 신경 씨 등 사북항쟁 관련자들은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을 신청한 상태다. 하지만 그중 조행웅 씨는 오랜동안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다 이미 지난 해 12월 사망하고야 말았다.
광부노동자 출신으로서 현재 강원도 도의원인 성희직 씨는 "인간 이하의 대접에 대해 몸을 던져 싸웠던 사북노동자 항쟁이 너무 소홀히 여겨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성 의원은 "사북노동자 항쟁은 계엄령 하에서 이후 노동자 투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며 "반드시 민주화운동으로서 역사적인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