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 보도연맹에 가입해 잡혀간 사람은 있는데 그 사람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른다.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가고 50년이 가도 돌아오지 않는 걸로 보아 죽은 건 맞는데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모른다. 어느 산에서 총살됐다, 어느 앞 바다에서 수장되었다, 어디 탄광에 매장됐다, 소문은 무성한데 진실을 아는 이들은 침묵하고 있다.
경상남도 창녕군의 보도연맹 관련 희생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무차별적으로 검거된 후 행방불명이 됐다. 본지 기자가 창녕군 소림, 용소, 귀동 마을 등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당시 경찰이 보도연맹이란 걸 만들어 죄 없는 민간인들을 '빨갱이'로 엮어 억울하게 죽였다고 하나같이 울분을 터트렸다.
권영준(76, 대지면 소림) 씨는 경찰이 48년 봄부터 마을사람들에게 보도연맹에 가입하라고 강요하기 시작했고 가입을 안 하면 '빨갱이'라고 몰아부쳐 조그마한 일이라도 생기면 '개 패듯 팼다'고 했다. 실제 소림의 이석쾌 씨는 경찰이 지목한 보도연맹원이 도망가는 걸 그냥 보고있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맞아 숨졌다. 그 결과 소림에서만도 20여 명이 넘는 사람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권씨는 "보도연맹원들에겐 도민증을 발급하지 않았고 전쟁이 나자 경찰, 헌병들이 피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도민증 없는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갔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잡혀간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어디로 끌려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추측과 소문 뿐이다.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김기진, 역사비평사)은 50년 음력 6월 10일경 창녕경찰서에 잡혀온 약 1백50여 명이 마산형무소로 실려갔다는 한 유족의 증언을 싣고 있다.
그러나 유족들과 보도연맹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희생자는 이 숫자보다 많은 것으로 보인다. 보도연맹 관련자들은 인민군이 창녕에 들어온 음력 7월 중순까지 계속 잡혀갔다. 대지면 용소의 하상근 씨는 창녕에 소개령이 내려 피난을 가려던 중 음력 7월 25일경에 잡혀갔다고 한다. 또한 보도연맹으로 창녕경찰서에 잡혀 있던 중 가까스로 풀려난 김재섭(약 10년 전 부산에서 사망) 씨는 "경찰서 마당에 잡혀와 있던 사람들을 트럭 한 대 분이 되면 밤에 트럭에 태워 덮개를 씌워선 어디론가 보내곤 했다"는 말을 했었다고 같은 마을에 살던 권영준 씨가 전했다.
유족들과 동네 사람들이 들은 소문은 이들이 '화왕산(창녕 소재) 작골 안에서 총살됐다' '송현동에서 총살됐다' '마산 앞바다에 수장됐다' '울산 앞바다에 수장됐다' '거제 앞바다에 수장됐다' 등 다양했다. 당시 잡혀간 사람들의 행방을 찾기 위한 시도는 4.19 혁명이 일어난 60년도에 있었지만 유족들의 노력은 결실을 볼 수 없었다.
ㅎ(79, 현재 서울거주)씨에 따르면 60년 7월 25일에 창녕유족회가 결성됐는데, 이날 유족회는 창녕경찰서로 찾아가 한국전쟁 당시 잡혀간 사람들의 '사망일시, 사망장소' 등을 요구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이에 경찰서장은 8월 1일경에 답을 줄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진상규명의 기회를 잡았던 유족들의 희망은 며칠 뒤 있었던 '7.29 사건' 이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를 지냈고 48년부터 50년까지 경상남도 사찰국장을 지내면서 창녕의 보도연맹 조직을 총괄했던 신영주 씨의 국회의원 출마였다. 당시 떠돌았던 말로 '출마해선 안될 사람'이 출마해 선거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알려지자, 창녕군민 2만 여명이 이에 항의해 경찰서로 몰려간 것이 7.29 사건이다. 그러나 창녕군민이 신영주를 붙잡아 '다시는 출마하지 않을 것' 등 5개항의 합의를 받아낸 사실이 동아일보 등 전국 신문에는 '빨갱이의 인민재판'으로 보도됐다. 이후 사망장소와 사망일시를 알려주겠다고 했던 경찰서장은 도망쳤고, 유족회 대표였던 ㅎ씨는 7·29 사건과 관련 구속됐다. 또 ㅎ씨는 61년 5.16 쿠데타 후 유족회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다시 구속, 감옥에서 2년을 살아야 했다. 7.29 사건 이후 유족회 활동은 중단됐고, 이후에도 감히 활동을 재개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ㅎ씨는 정부 차원의 탄압 외에도 유족회가 다시 활동할 수 없던 이유가 '아직까지 움직이고 있는 신영주 계통의 사람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선거로 당선돼 창녕에서 86년까지 12년 동안 공직에 있었던 ㅎ씨는 그 때 잡혀간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아는 사람이 오랜 기간 권력을 누렸고, 그 중에는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ㅎ씨에 따르면 CIC(특무대), 경찰, 민간대표로 구성된 이들이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잡아 들여 처리했는데, 이 중 CIC 대장, 경찰 2명, 민간대표 1명이 아직 살아있다고 했다. 더구나 당시 민간인 대표 성모(79, 현재 서울거주) 씨는 ㅎ씨의 동창이라고 한다. ㅎ씨는 창녕에 살 때부터 지금까지 형이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만 알려 달라고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성씨에게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당한 불이익과 탄압으로 또 혹시나 자식들에게 피해가 올까 염려하며 이름을 밝히지 말라던 ㅎ씨는 "이 사람들이 양심선언은 죽어도 안 하니까 법이 통과되면 모를까 그전에는..."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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