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가장 훌륭한 인권 교과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을 찾는 할머니들이 있다. 간첩 누명을 뒤집어쓴 채 몇십 년을 복역한 후 다시 법원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다. 반세기 이상 '강요된 침묵'에서 벗어나 최근에서야 무참히 학살당한 영혼들의 한을 달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들의 주검을 가슴에 묻고 소복 차림으로 전국 군부대를 쫓아다니는 어머니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과거 국가권력에 의해 이루어진 '조직적 은폐'와 '강요된 망각'에 맞서 '기억의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이다.
일제 강점기를 넘어 전쟁과 분단, 독재와 폭압으로 굴절된 우리의 근·현대사는 이렇듯 무수한 '한'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진실은 조직적으로 은폐되었고, 피해자들과 가족들은 오히려 '빨갱이'나 '폭도' 등으로 낙인찍히는 2중, 3중의 폭력을 당해야만 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2백 40만,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8만∼20만, 한국전쟁 전후 학살된 민간인 1백만, 그리고 수많은 조작사건과 고문, 실종, 정치테러의 희생자들. 이들이 당한 억울한 죽음과 인권침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일은 부끄러운 과거 역사를 '청산'하고 '소수'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과거를 '현재화'함으로써 반인권적 제도와 관행을 바로잡고, 우리와 미래세대들이 다시는 동일한 폭력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새 정부가 피해자들은 물론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겪고있는 상처와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2년여 동안 활동해 온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사건'만을 다루었을 뿐이며, 또한 진실의 일부만을 밝혀냈을 뿐이다. 새 정부는 죽음과 인권침해의 '등급'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건들의 역사적 진실을 온전히 밝혀내지 않으면 안된다. 또 진실의 일부만을 밝히고선 '개별 보상' 차원에서 사건을 성급히 마무리짓는 잘못도 사라져야 한다. 이들 사건들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저질러진 국가범죄'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혀내고, 재발방지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또한 고 박영두 씨 치사사건처럼 이미 국가범죄임이 명백히 밝혀진 사안조차 '공소시효'에 발목잡혀 가해자들이 처벌되지 못하는 현실, 고문에 따른 자백과 허위증거로 조작되었음이 명백한 사건들이 '엄격한 재심 요건'에 발목잡혀 오욕의 멍에를 계속 짊어져야 하는 비극도 사라져야 한다.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국제관습법은 우리 사회에도 적용되어야 하며, 재심의 요건도 최대한 낮춰져야 한다.
국가가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재발 방지에 나서는 것은 그 자체로 중대한 인권의식 고양의 효과를 낳는다. 진실을 찾고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사회적 노력은 가장 훌륭한 인권교과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