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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연재] 국가인권위원회 들여다보기 : 인권침해 사건 조사, 나무보다는 숲은 보라


"출장 갔다오면 책상 위에 새 사건이 산처럼 쌓여 있다. 이걸 바라보면 한숨만 나온다."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 조사관들은 매일 격무에 시달린다. 아침 9시 출근해서 퇴근 시간을 넘겨 밤 9시, 12시 퇴근을 밥먹듯이 한다고 한다. 인권위가 지난해 연말까지 진정 접수된 인권침해 사건 2천8백34건 중 1천3백60건을 종결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격무를 마다 않은 조사관들의 노고 덕분이었다.


쌓이는 사건, 무거운 한숨

그럼에도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인 사건은 처리한 사건보다 많은 1천4백74건. 접수된 차별사건이 총 190건으로 전체 진정사건의 5.3%를 차지하는 데 비해 인권침해 사건은 78.7%를 차지하고 있으니 인권위가 진정사건에 매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인권침해 사건 처리에 허덕이고 있다는 말과 같다.

인권위 전 직원 중 인권침해조사국에 배정된 일반 조사관은 모두 26명. 이들은 지난 해 4월 조사관으로 임명받았을 때 각자 50∼100건씩의 사건을 배정받았다. 그중 대부분을 처리했지만, 다시 그들은 처음보다 많은 사건을 안고 있다.

이들 조사관들은 사건 배정을 받으면 의견서 작성, 조사 기획, 조사, 조사결과 보고서 작성 등의 과정을 거쳐 소위원회의 결정을 기다린다. 국가기관을 상대로 하는 조사가 순탄할 리도 없다. 거의 인권위의 협조 요청을 무시하기 일쑤인 국가기관과의 힘 겨루기도 사건 처리를 지연시키는 주요 요인 중 하나다. 거기에 "밤새워 조사하고 보고서 써서 올리면 1주일에 단 한 번, 단 몇 시간 열리는 회의에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심의를 다음으로 미루기 일쑤"인 소위원회의 결정 지연도 문제다. 특히 '민감한 사건'의 경우 위원들이 너무 앞뒤를 재다 보니 한 사건 결정이 몇달째 보류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사건 수 비해 조사관은 태부족

이런 현상에 대해 강명득 인권침해조사국장은 "출범 초기부터 6개월 가량을 조사관도 없이 사건 진정을 받았다. 출범 초기 무더기 진정 때문에 사건이 적체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김형완 인권상담센터 소장은 "초기에는 조사 요건이 되지 않는 사건도 모두 접수받아 조사국으로 넘겼지만, 지금은 상담센터에서 어느 정도 걸러서 넘긴다"며 조사관의 부담을 덜기 위한 노력이 진행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진정 접수되는 사건은 줄어들 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사건 수에 비해서 조사관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진단에는 인권위 관계자 모두가 동의한다. 최영애 사무총장은 "조사관이 태부족임에도 불구하고 직제령에 있는 전문계약직이나 파견직 공무원은 행자부의 반대로 채용하지 못하고 있다"며 "조사관의 충원과 조사업무의 간소화가 이뤄져야 사건 적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사 전략의 부재도 큰 몫 차지

조사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인권위의 주장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그러나 이미 있는 인력들이 효율적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처리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인권위의 전략 부재도 진정사건 적체를 낳는 주요 요인이다.

지난해 12월말 현재 진정 접수된 인권침해사건 중 각하된 사건이 무려 86%. 결국 조사 요건이 되지 않는 각하될 사건을 초동 조사하고 조사 불가 판단을 내리는 데 인권위 조사관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매달려 왔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문제는 사건의 맥락을 짚어낼 수 있느냐에 있다. 사건의 경중을 가려서 집중할 사건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한 사건을 해결해도 그 효과를 몇 배씩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획조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다산인권센터 송원찬 상임활동가도 "조사 인력이 모자라는 것도 문제지만, 이미 상당량의 사건 조사 경험을 축적한 것을 바탕으로 사건을 유형화하고, 유형별로 사건을 처리하는 지침이 조사관들에게 교육되고, 진정인에게도 홍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권위에 진정 접수된 인권침해사건을 대상 기관별로 보면 구금시설(39.3%), 경찰(29.6%), 검찰(10.6%) 등의 순이다. 구금시설과 경찰, 검찰 관련 사건이 전체 인권침해 사건의 거의 80%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시설과 관련한 인권문제나 인권침해의 유형은 이미 나올 대로 다 나와 있는 상황이다. 결국 인권위가 개별 사건 처리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구금시설에 대한 기획 방문조사와 같은 전략적 접근을 통해 사건 적체를 풀 수 있다는 것이다.


인권침해구조에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인권위 사무처는 지난 10일 전원위원회에 인권침해사건 권리구제절차의 간소화를 꾀한 개정안을 상정했다. 사건처리 행정절차를 간소화하고, 법규정 상 명백한 각하 대상인 경우 등을 인권상담센터가 의견서를 작성, 위원회에 보고하는 것으로 끝내자는 것이 요점이다. 이럴 경우 조사과정을 거쳐야 할 진정사건을 상당수 덜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안건은 위원들의 원론적인 반론에 부딪혀 다음 회의로 넘겨졌다.

인권위가 밀려드는 진정사건을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은 진정 사건에 매몰되었다는 비난에서 벗어나 현실 인권문제에 능동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될 것이다.

이는 인권위가 개별 인권침해사건에 대한 미시적 접근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들을 양산해내는 인권침해구조를 개혁하는 거시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으로 전환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