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법조문 읽을 거면 뭐하러 제네바 갔나

한국정부, 인종차별철폐협약 이행보고서 심의회의 열려

한국정부의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아래 인종차별철폐협약) 이행상황을 평가하기 위한 심의회의가 지난 8일 오후와 11일 오전에 걸쳐 제네바 유엔본부에서 열렸다.

주제네바 한국대표부 정의용 대사는 모두발언에서 한국정부는 국가인권위가 설립되었고, 고용허가제 도입으로 그 동안 문제됐던 이주노동자 인권침해 문제가 대부분 해결될 것이며,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가 진행 중이라는 점 등을 특히 강조하면서 이주노동자와 외국아동, 난민 등에 대한 국내의 정책과 제도들을 소개했다.

이어 18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인종차별철폐위원회(아래 위원회) 위원들은 △협약의 국내법적 지위 △더반 세계인종차별철폐회의 후속조치 △국가인권위의 권한과 위원 임명절차 △산업연수생 제도 존속 이유 △이주노동자의 단결권 △불법체류자의 합법화 문제 △혼혈아동에 대한 인종적 편견 △난민 또는 난민 신청인에 대한 처우 △정부보고서 제출시 민간단체와 사전협의를 거쳤는지 여부 등을 질문했다.

또 위원회는 정부보고서에 여성이 직면할 수 있는 다중적인 차별 양상에 관한 정보가 없음을 지적하면서 여성 이주노동자와 국제인신매매 피해여성 등에 관한 정보를 요구하였고, 위원회의 거듭된 권고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행위를 명시적으로 금지, 처벌하는 국내법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점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한국정부, 형식적 보고와 답변 일관

그러나 한국정부는 위원들의 질문 목적이나 배경을 인식하지 못한 채 현실에 대한 평가 없이 관련 법률과 정책만 나열했고, 정부보고서에 이미 서술한 내용을 반복하는 수준의 답변을 내놓는 데 그쳤다. 특히 산업연수생 제도를 폐지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본래 폐지하려고 했으나 국내 협상과정에서 폐지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며 매우 무성의한 답변을 내놓았다. 또 이주노동자 권리협약의 비준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이주노동자를 국내에 받아들인 지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아직 비준은 시기상조라고 답하였고, 이주노동자의 단결권에 대해서는 인종을 이유로 단결권에 제약을 가하는 제도나 관행은 없다고 답변했다. 여성이 직면할 수 있는 다중적 차별의 문제에 대해서도 자세한 국내 현황에 대한 언급 없이 위원회의 우려를 국내정책에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고 간단히 답하는 정도에 그쳤다.

심의회의를 지켜본 팍스로마나 이성훈 사무국장은 "정부가 법률만능주의에 빠져있으며 국내 법률과 제도의 실제 시행 상황을 평가하며 건설적인 대화를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심의회의의 본래 목적을 망각한 채 형식적인 태도로만 일관했다"고 평가했다.


위원회가 한국상황에 만족했다?

정부의 답변이 끝난 뒤 위원들은 계속 침묵을 지켰고, 한국담당관인 첸유안 탕 위원의 형식적인 감사 멘트로 회의는 끝났다. 위원회가 정부의 답변에 추가적인 코멘트나 질문을 던지고 거듭 확인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아무런 추가 질문이 없었던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심의회의가 끝난 후 정부대표단은 완벽한 정부 답변에 위원회가 압도되었다며 자축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위원들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우선 첸유안 탕 위원은 "정부대표단이 준비한 답변서를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읽고 있는 것을 보며 만약 추가 질문을 던져도 실질적인 답변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았다. 위원회가 이번에 던진 질문들은 대부분 지난 회의 때 똑같이 질문했던 내용들이므로 질문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이번 심의회의 때 한국정부가 제대로 답변을 제공하지 못한 이슈들은 위원회의 최종견해에 포함될 것"이라고 말했다. 라가반 바수데반 필라이 위원도 "한국정부의 협약 이행상황에 대한 위원회의 공식 입장은 최종견해를 통해 발표될 것이며, 최종견해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좀 더 많은 질의와 평가가 진행될 것"이라고 답했다.

한편 회의를 지켜본 '인종차별철폐를위한국제운동'(IMADAR)의 재클린 바이그래이브 씨는 "18년 동안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은 라오스정부 문제를 시급히 논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위원회가 한국문제를 다소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며 "최종견해를 통해 좀더 적극적인 우려 표명과 권고가 나올 것이라 예상되지만, 한국정부의 답변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코멘트나 추가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은 매우 아쉽다"며 위원회의 무성의한 태도를 꼬집었다. 한국정부에 대한 위원회의 최종견해는 오는 22일 발표될 예정이다.


국내 민간단체의 적극적 참여 필요

한편 첸유안 탕 위원은 위원회가 한국의 협약 이행상황을 제대로 모니터링하기 위해서는 국내 민간단체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관련 자료와 정보를 위원회에 꾸준히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협약에 가입한 지 20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국내 민간단체들도 협약의 국내 이행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위원회의 심의를 돕기 위한 반박보고서 제출도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첸유안 탕 위원은 "사실 위원회 위원들이 한국내 인종차별 문제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심의회의를 돕기 위한 반박보고서뿐 아니라 위원들이 한국내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면 한다"고 말했다.

반인종주의정보센터(ARIS)의 안키 플로레스 씨 역시 "개인통보제도, 조기경보조치, 긴급절차 등 협약 내 제도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인종차별의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민간단체들이 협약의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고 사건을 발굴, 위원회에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며 협약에 대한 국내 민간단체들의 관심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