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혀진 과거사를 올곧게 세우고자 하는 숱한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간신히 만들어진 법안들이 진흙탕 싸움에 여념이 없는 정치권 때문에 자칫 수포로 돌아갈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임시국회 폐회를 이틀 앞둔 6일 현재까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제2법안심사소위(아래 법안심사소위)는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핵심 4대 법안의 심의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어 피해자들과 인권사회단체들의 강력한 비판을 받고 있다. 계류 중인 4대 법안은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사건진상규명및명예회복에관한법률안(아래 학살규명법),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조사특별법(아래 강제동원특별법), 친일반민족조사법, 동학농민혁명명예회복법 등이다.
강제동원특별법 제정 추진위와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규명범국민위원회(아래 학살규명 범국민위)는 6일 안국동 느티나무카페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6대 국회가 막바지에 이르러 이번 회기에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다시 원점부터 시작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법안심사소위에 과거사 4대 법안을 조속히 심의할 것을 촉구했다.
학살규명 범국민위 익산유족회 이창근 회장은 "한국전쟁 당시 익산역에서 미군이 민간인들에게 가한 폭격 때문에 부모를 모두 잃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 회장은 "진상규명을 위해 1999년부터 미대사관을 비롯하여 다녀보지 않은 데가 없고, 학살규명법 제정을 위하여 국회의원 60여명을 면담도 해봤지만, 국회의원들의 밥그릇 다툼 때문에 법 제정이 번번이 무산되었다"며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성토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인 김순덕(84세) 씨는 "성노예 생활을 했던 시절에 생긴 고질적인 병 때문에 아직까지도 매일 병원에 의탁하여 살고 있다"고 밝힌 뒤 "강제동원특별법이 이번에는 통과될 줄 알고 설레는 마음으로 밤잠도 못 이루며 기다려왔다"고 심경을 전했다. 김 씨는 숱한 성노예 피해 여성들이 죽음까지 강요하는 억압을 이기지 못한 채 중국 등지에서 목을 매 죽어 갔다면서 "강제동원특별법 제정을 위해 좀더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학살규명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183개 인권사회단체들의 공동 성명서도 함께 발표됐다. 이들 단체들은 "학살규명법은 각계의 여론을 수렴하여 발의되었고 국회 '과거사특위'에서 세심한 검토를 거쳐 법사위에 회부된 상태이기 때문에, 법사위가 심의를 지연시키는 것은 월권"이라고 규정했다. 다산인권센터, 유가협 등 14개 인권단체들도 같은 날 별도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위헌적인 독소조항으로 가득 찬 집시법의 개악에는 발빠르게 움직였던 법사위가 정의와 인권을 세우는 법률의 제정과 개정에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며 법사위를 강력 규탄했다.
학살규명법과 강제동원특별법은 모두 진상규명 기구를 대통령 직속의 독립기구가 아니라 국무총리 산하 기구로 설치하도록 하고 있어, 온전한 진상 규명에는 한계점이 명확하다고 지적되어 왔다. 강제동원특별법 추진위 박은희 사무국장은 "일본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과거사를 진상규명하는 데 국무총리 산하 기구의 위상으로는 제약이 많이 따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단체들과 왜곡된 과거사의 희생양으로 살아왔던 피해자들은 불안전한 법안의 제정이나마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한편 7일 열리는 법안심사소위에 과거사 4대 법안이 안건으로 상정되어 있지만, 범국민위 이창수 학살규명법 쟁취위원장은 "진상 규명을 위한 국회의 의지가 높지 않은 상태여서 소위가 무사히 열리고 국회 본회의에서 4대 법안이 통과될 수 있을지는 좀더 두고봐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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