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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 즐거운 물구나무 ◀ '지문'만이 나를 말한다?

어느 날 J 씨는 인감증명을 떼러 동사무소에 갔다. 지문날인거부자인 J 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여권과 인감도장을 내밀고 인감증명서 발급을 요청했다. 그런데 공무원은 J 씨에게 의심스런 눈길을 보내며 주민등록번호를 불러보라는 주문을 했다. J 씨는 당황스러워 약간 더듬거리면서 주민등록번호를 말했다. 이어 공무원은 "지문이 없는 것은 신분증이 아니다"라며 지문이 박힌 주민등록증을 만들라고 강권했다. 게다가 인감증명발급 대장을 내밀며 "이곳에 지문을 찍어야만 인감증명서를 떼어줄 수 있다"고 윽박질렀다. J 씨는 1999년 전국민 주민등록증 갱신 때 지문날인을 거부해 플라스틱 주민등록증이 없다. 공무원이 보여준 모니터 화면에는 J 씨의 이름, 주소, 주민등록번호 등이 기록되어 있지만 디지털화된 사진과 지문란은 비어 있었다.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않은 J 씨에게 공무원은 "당신이 누군지 어떻게 아느냐"라며 J 씨를 J씨로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민등록증' 뿐임을 강조했다. 분명 국가가 발급한 또 다른 신분증 '여권'을 제시했으나 헛수고였다.

결국 J 씨는 대리인을 통해 인감증명서를 발급 받았지만, 지문날인을 거부했다고 민원업무조차 제한 받는 현실에 분통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최근 수원시가 지문감식기를 동원하여 즉석에서 디지털화된 지문을 통해 본인여부를 확인한다고 하니 J 씨는 이 땅에서 살길이 막막하다. 국가에서 증명한 사진이 박힌 신분증도 지문이 없으면 안 된다는 행정편의주의 발상에 J 씨는 아연실색 할뿐이다. '국민감시'와 '행정효율'을 앞세우는 정부의 태도에 인권의 자리는 없었다.

지문날인이 전국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 전세계 어느 나라도 열 손가락 모두 지문날인을 강요하는 곳은 없다. 개인식별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이라면 최소한의 정보로 신원확인을 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면 된다. 최소한의 정보에 지문날인과 주민등록번호는 1순위로 빠져야할 대상. 지문날인과 주민등록번호, 우리에게 당연하고 익숙한 것이지만 '원래 그런 것이 없다고 상상'하면 다른 방식이 보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