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 말은 선행을 감추려는 겸양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변명에도 들어맞는다. 그러나 피해자가 말하고 우리가 기억하는 한, 국가가 저지른 인권 침해를 영원히 감출 수는 없다. 지난 1월 20일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2부)에서 재판부는 국가 책임을 일부 인정해 원고 120명 중 57명에게 청구액 절반인 500만 원을 위자료로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미군 기지촌 위안부들을 '낙검자 수용소'에 격리 수용한 행위는 국민의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중대한 위법 행위라고 본 이번 판결은, 사상 처음으로 미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국가의 책임을 일부라도 인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판결이다.
미군 위안부라는 존재
한국 정부는 1950년대 초부터 외화 벌이를 위해 성매매 집결지, 미군 위안소를 조성하고 관리하며 여성 인권을 짓밟았다. 1945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시작된 미군 위안소의 역사는 한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69년 제정된 전염병 예방법 시행령 제4조는 기지촌 여성을 '위안부'라고 공식적으로 표기했다. 현재 한국 정부는 '직접' 위안소를 만들지 않았다며 책임을 회피하지만 위안부 여성들을 명부에 등록시켜 성병을 관리하고, 위안부 자치대를 만들어 교육을 했다는 사실은 국가가 개입하고 운영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박정희 정권 때 국가 개입은 더 본격화됐다. 1962년 정부는 성매매 단속을 하지 않는 '적선 지구'라는 특정 윤락 지역을 지정했다. 104개의 적선지구는 대부분 미군 기지촌 지역과 일치했고 이 구역은 한미친선협의회가 공동으로 관리했다. 이후 도입된 관광진흥법에서 기지촌 클럽은 특수 관광시설로 면세 혜택까지 받았다. 그 덕에 미군 기지촌 수입은 1960년대에 GNP의 25%에 달했고, 클럽이 벌어들이는 수입이 한국 전체 외화 수입의 10%에 육박할 정도였다. 1971년 청와대는 주한미군 철수 억제를 국가 안보의 중요 목표로 삼고 '기지촌 정화위원회'를 만들었다. '기지촌 정화위원회'는 성병 대책과 기지촌 구역 재정리, 식수 공급 등 기지촌 전반에 대한 행정 관리를 했다, 또한 정기적으로 관계 공무원, 관광협회장이 '애국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미군 위안부들에게 교육했다. 위안부 여성을 애국자라 격려하며 '미군에게 서비스를 잘하라'거나 성병 검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렇듯 미군 기지촌 성매매는 한국 정부의 적극적 개입 속에 수많은 여성들이 미군 위안부로서 역할을 부여받고 동원된 결과였다.
반인권 범죄의 공소시효
재판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국가손해배상 청구권의 5년 시효기간이 만료됐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보건소 직원이나 경찰 공무원은 주요 국가기관으로 인식되므로 강제수용치료가 적법한 법령에 근거하지 않은 위법 행위라는 사실을 피해자들이 인식하기 쉽지 않아 위안부여성들의 권리행사가 어려웠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국가에 의하여 권리 행사 기회를 사실상 장기간 차단당한 것이므로 손해배상 청구에 관한 정부의 소멸시효 주장을 기각했다. 더구나 권위주의 시대의 폐쇄적,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인 사회 문화 속에서 금기시되던 성매매 종사와 격리수용 경험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기에 피해자들이 손배청구라는 권리 행사를 방치한 것으로도 볼 수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국가기관의 국민에게 행한 반인권 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는 국제 사회의 흐름이므로, 민사상으로도 피해 회복의 길을 봉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언급한 점은 과거사 문제 해결에서도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낙검자 수용소'를 만들어 강제적으로 성병 검사를 실시하고 격리 치료한 것만을 위법 행위로 보았다. 입증 곤란을 이유로 기지촌을 국가가 조성·관리·운영했다는 여성 피해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는 원고들이 주장하는 피해가 주로 1950년대부터 1970~1980년대까지의 국가의 행위로, 각종 관공서나 관할청 등에 있는 관련 문서들의 보존 기간이 지나 (증거로 삼을 만한) 문서가 대부분 폐기돼서 객관적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범죄 피해자의 특성상 피해를 인지하거나 자신의 피해를 말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며, 국가 책임의 과거사 특성 상 증거 자료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재판부는 정부의 소멸시효 주장을 기각했던 것처럼, 미군 위안부로서 살아온 그녀들의 존재와 삶 자체를 매우 중요하고 충분한 증거로 인정했어야 했다.
여성을 동원하고 착취한 가부장제 국가의 전쟁 정치
한국 정부는 위안부 여성을 관리함으로써 경제적 이익과 미군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적선지구를 조성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고 격리수용소를 만들어 위안부 여성의 몸을 관리하고 애국교육을 하며 서비스를 강조한 사실은 국가의 적극적 행위다. 1961년 한국은 유엔여성인신매매 방지에 관한 조약에 서명하고 동시에 윤락 행위 방지법을 도입했으면서도 성매매 단속을 받지 않는 기지촌을 만들며 적극적으로 개입한 국가 책임이 있다.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한국 정부였기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지 않았던 2016년 한일 합의가 가능했다. 미군 기지촌에 대한 환경 개선과 성병 예방이라는 공익을 제공했을 뿐이라는 한국 정부의 태도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가 무엇이 다른가. 식민 지배 체제에서 일본군이 조선을 비롯한 전 세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일본군 위안부나, 전쟁 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미국에 종속적인 군사 지배 체제에서 생겨난 미군 위안부 문제는 다르지 않다. 가부장제 체제를 떠받치는 군사주의-전쟁 정치 체제가 여성을 동원하고 성적 폭력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온 역사가 바로 위안부 여성의 삶 자체였다.
국가의 책임이다
편견에 기대 책임을 회피해 온 정부와 달리 그들에게 손을 건네고 힘을 준 것은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이었다. 2009년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과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이 만난 자리에서 고(故) 길원옥 할머니가 미군 기지촌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말했다. "나도 일본군에게 당한 일이 내 잘못인 것만 같아서 숨기고 살았다. 그런데 국가의 잘못이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니까 숨지 말고 당당하게 힘내라"고.
2016년 첫 '나비평화상'을 '두레방', '새움터', '햇살사회복지회' 등 주한미군 기지촌 문제에 천착해 온 단체들이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길은 다르지 않다. 단지 반일 감정에만 기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여성을 성적 도구화해 돈을 벌고 전쟁을 벌였던 과거사를 직시하기 위해서 국가가 먼저 사과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근거 법률을 만들어 위안부 피해 실태 조사를 하고 그에 따른 구제책을 만들어야 한다. 19대 국회 때 발의됐으나 제정되지 못한 <주한미군기지촌 성매매피해 진상규명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처럼 국가가 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래야 "국가가 우리를 버렸다"는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울부짖음이 허공을 맴돌지 않을 것이다.
2014년 시작된 소송이 이제 1심 판결이 났다. 소송은 국가 책임을 법정에서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제 사회적으로 미군 위안부 문제를 풀기 위해서 막 입을 뗀 그녀들의 목소리에 우리 모두 귀를 기울이며 해결 과정에 함께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