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주]
세상에 너무나 크고 작은 일들이 넘쳐나지요. 그 일들을 보며 우리가 벼려야 할 인권의 가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질서와 관계는 무엇인지 생각하는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넘쳐나는 '인권' 속에서 진짜 인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나누기 위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하나의 주제에 대해 매주 논의하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인권감수성을 건드리는 소박한 글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때로는 촉촉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가가기를 기대합니다.
1946년 한 여성이 반겨주는 이 없는 고국에 돌아왔다.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강제로 일본군을 따라 다녀야 했던 이 여성은 고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주변의 멸시와 폭력에 시달리며 ‘박복하게’ 반세기 가량을 쥐죽은 듯 지내야 했다. 그런 그녀가 1991년 처음 자신이 겪은 전쟁 범죄 문제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증언으로 사회적으로 망각을 강요받았던, 해결되지 않은 정의의 문제로서 ‘위안부’ 문제가 제기되었다.
지난 12월 28일, 1965년에 이어 다시 한․일 양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를 선언하였다. 피해 당사자를 비롯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온 그 누구도 논의과정에서 배제된 채 이루어진 협상이었다. 협의내용에 전쟁 범죄의 공식적 인정과 진상규명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두루뭉술한 사과와 민간재단 설립비 10억 엔을 지원한다는 빈약한 내용만을 담았을 뿐이었다. 정부는 미래를 위한 국익적 판단이라며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해 당사자에게, 국민들에게 화해와 용서를 강요하는 정부의 태도에 분노는 더욱 커졌다.
전쟁 범죄 해결 주체로서 위안부 피해 당사자
가장 분노케 하는 것은 피해 당사자들이 철저히 무시된 협의과정이다.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 논의가 본격화되게 된 계기는 1991년 김학순 할머니를 시작으로 남한에서만 238명의 피해 당사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증언하면서이다. 이전까지 침묵하거나 망각할 것을 강요당했던 전쟁 범죄에 대해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 증언하고 해결을 위한 주체로 나서면서 위안부 문제는 우리 사회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이 과정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외회를 비롯해 많은 이들의 노력이 함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국제사회에서 전쟁 성범죄에 대한 규정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가 이번 한‧일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쟁 피해 당사자로서 이들에 대한 지원이 정부의 역할이라는 2011년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서이다. 그 결정을 이끌어낸 이들은 바로 피해 당사자들이었다. 한국정부가 이 문제에 수동적으로 대응해온 지난 수십 년간 피해 당사자들은 미국을 비롯해 각국 의회에서 위안부 관련 결의안이 채택되도록 하고, 곳곳에 기림비와 소녀상을 세우며 이 문제를 국제사회로 공론화했다. 피해 당사자들, 그리고 함께 했던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마련된 협상 테이블에 나온 정부는 이들을 배제했고, “최종적 및 불가역적”이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합의내용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있다. 그저 협상했다는 것 자체로 자화자찬에만 몰두하는 모습이다. 우리보다 늦게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대만에서는 현재 위안부 피해 당사자를 문제해결의 주체로서 존중하고 사회 각계각층의 대표자들이 함께 모여 일본과의 협상에서 제기할 해결책을 공동모색하고 있다. 그런 것과 비교해보면 참담함은 더욱 커진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의 폭력의 재현
이번 합의는 위안부 문제가 우리 사회에 던졌던 의미마저 훼손하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싸움은 남성중심의 민족주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전쟁 성범죄는 남성중심적 사고방식에 민족주의의 굴레까지 더해지며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다. 그래서 피해 당사자들이 민족이라는 집단 안에서 오히려 수치를 느끼며 숨어있어야 할 존재로 살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렇게 숨어서 유령처럼 살 수밖에 없던 이들이 피해 당사자로서 그리고 해결 주체로서 자신을 호명하고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민족과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로 우리는 단순히 일제의 강압에서 벗어난 해방의 역사만이 아니라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부정된, 망각이 강요된 여성의 경험이 더해진 역사인식을 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역사적 부정의를 해소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정부는 국익이라는 집단적 이익을 내세우며, ‘대(大)를 위해 소(小)는 희생하라’는 식으로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폭력을 반복하고 있다. 윤병세 외교부장관은 “한․일 관계를 잘 이끌어가는 것은 한․미 관계 개선을 위해서라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정부는 1965년과 마찬가지로 한․미․일 동맹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위안부 문제를 이용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군사력 강화 움직임은 더욱 강화되고, 한반도 유사시 일본이 다시 군대를 파견할 가능성까지 열어놓게 되었다. 정부의 역할이자 의무는 국민의 존엄성을 지키고, 그 사회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다. 이는 외교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가 보이는 일련의 모습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고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국익을 내세웠으나 도리어 동아시아의 평화마저 위협하는 계기가 더해졌을 뿐이다.
회복적 정의에 기반해야
국제인권원칙에서는 ‘회복적 정의’라는 개념을 통해 피해 당사자가 정의 구현의 주체이며 그들의 요구와 권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가해자를 단순히 처벌하는 것을 넘어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명확히 밝혀질 때만이 진정으로 사회구성원 안에서 관계의 복원과 화해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이 그동안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진상규명, 국회결의 사죄, 법적 배상은 이러한 맥락에 맞닿아있다. 그러나 이번 한‧일 협상은 당사자 배제는 물론이며 전쟁 범죄로서의 명확한 규정이나 진상규명, 법적 배상 등이 모두 무시되었다. 그런데도 수용을 강요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기주의라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다,
2012년 대법원은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 및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부인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1965년 한․일 협정이 국가 간 채권채무에 대한 정치적 합의일 뿐이며 개인의 청구권과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은 유효하다고 했다. 이번 협상 또한 피해 당사자의 의사가 무시되었고, 일본의 공식적인 범죄 행위 인정이 없다는 점에서 ‘합의’로서 의미를 상실한다. 회복적 정의의 실현은 단순히 피해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우리 사회가 정의를 구현하는 과정의 시험대이기도 하다. 올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 잡는 것, 그렇게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해결의 시작은 합의 무효화에서부터
합의라는 요식 행위에 치우쳐 합의문마저 만들지 않은 정부의 꼼수는 최근 소녀상 철거가 합의사항인지를 놓고 입씨름하는 한심한 상황을 낳았다. 도리어 아베 정부는 역사 재평가를 내세우면서 전쟁 범죄 행위 자체를 없었던 것처럼 만들려 하고 있다. 역사적 부정의가 전혀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사과와 진상규명 없이 위안부 문제가 봉합되어서는 안 된다. 잘못된 협상, 기만적인 합의를 거부하고 무효화하기 위해 정부를 압박하는 행동을 이어가야 한다. 그리고 회복적 정의의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가 진정한 해결로 나아갈 수 있는 기준을 함께 확인하고 이것이 반영되도록 일본 정부를 향한 압박도 지속해야 한다. 역사의 산증인이자 평화의 각성자였던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이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상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우리의 움직임이 더욱 절실하다.
덧붙임
초코파이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