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는 태평양 전쟁기간(1937~1945) 동안 일본 영토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곳이다. 미국은 일본 본토를 공략하기 위한 발판으로 오키나와를 공격했다. 당시 60만 오키나와 군민들 가운데 1/4이 숨졌다. 그만큼 이곳 사람들은 전쟁이 가져다 준 죽음과 삶의 기억을 저장하고 있다. 전쟁은 삶과 죽음이 한 순간에 교차하는 가장 극적인 순간이다. 60년 전 전쟁의 기억을 이들은 어떻게 품고 있을까? 오키나와에 가기 전 참가자들끼리 세미나를 하면서 이 질문은 내 머리 속을 빙빙 돌았다. 5월 15일 인천 공항을 떠난 비행기가 나하 공항에 다가가기 위해 고도를 낮출 때 약 5분여동안 보았던 오키나와 근해 바다 빛깔은 도저히 전쟁의 이미지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가 남쪽으로 튀고 싶었던 그 섬이 저 아래 있는 것이다.
5월 16일 방문지는 평화 공원과 평화기원 자료관이다. 이곳은 오키나와 남쪽 이토만시 마부니 언덕에 있고 부지 만해도 60여만 평에 이른다. 이곳은 1975년 오키나와현에서 조성한 것으로 크기와 규모가 예상했던 것보다 거대했다. 평화 공원과 평화기원 자료관이 위치한 장소는 오키나와 전쟁에서 연합군이 공격하자 군민들이 집단 자결한 절벽을 끼고 있다.
처음에 갔던 곳은 오키나와에 끌려온 조선인들의 죽음을 기리는 위령비였다. 추모글에는 한국인들이 징용으로 끌려와 학살당했다고 전한다. 위령비가 만들어진 시점은 1975년이며 추모글 끝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대통령 박정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평화의 초석’이다. ‘비석이 무덤처럼 있다’고 할 만한 이곳에는 오키나와 전에서 죽어간 사람의 이름이 일본군․연합군, 전투원·비전투원, 가해자․피해자의 구별 없이 국적을 불문하고 새겨져 있다. 비석 무리 한 켠에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이름의 글자들도 있었으나 숫자는 매우 적었다. 이곳을 안내해준 유영자 선생님은 한국인 사망자 수가 적은 이유에 대해, 징용으로 끌려가 어렵게 살아남은 강인창 선생님의 말을 전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곳에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다. 전쟁에 관한 그 어떤 사과도 없이 평화만을 얘기하는 것은 기만이다”라고. 이어 유영자 선생님은 “중요한 것은 평화를 어느 사람의 입장에서 정의하느냐”라고 힘주어 말한다. 유영자 선생님은 한국에서 온 참가자들에게 한국에 돌아가거든 꼭 강인창 선생님을 찾아가보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2004년 재 개관한 평화기원 자료관 안으로 들어가서 오키나와의 역사와 삶, 일본 침략과 함께 이루어진 근대화와 군사화 과정, 오키나와 전쟁과 이후 미군정, 이후에 전개된 반기지 운동을 사진과 실물 모형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중 제4전시실은 오키나와 주민이 본 오키나와 전쟁의 ‘증언’을 모아 두었다. 전쟁에 관한 구술기록을 채록해서 일본어와 영어로 자료화했다.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겪었을 민중의 고통을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긴 힘이 순간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이명박 정권이 집권한 이후 과거사위원회의 활동이 힘겨웠던 한국의 현실이 떠오른다.
성별화된 방식의 전쟁 기억
5월 18일 잠깐 방문한 평화미술관도 내게는 한국과 오키나와의 다른 점을 느끼게 한다. 평화미술관은 미군이 반환한 토지에 민간 후원으로 개인이 만들었다. 평화미술관은 후텐마 기지 바로 옆에 있어서 미술관 옥상으로 올라가면 기지 전체를 감상할 수 있다. 미군이 반환한 토지에 ‘전쟁기념관’을 세워 전쟁을 기억하는 한국은 오키나와랑 어디서부터 다른 걸까?
위령비든, 비석이든, 자료관이든 평화를 기리는 조형물에 전쟁에서 사라진 여성들은 찾을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군사물품보다도 가장 먼저 도착했다고 하는 군 위안부의 실체는 이곳에서 볼 수 없다. 전쟁을 기억하고 평화를 만드는 방식이 얼마나 성별화 되는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전쟁이 발생한 그곳, 일본 정부나 한국 정부는 자신들이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만 ‘평화’라는 이름으로 잘 모셔두었다.
오끼나와에도 8만여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114개 위안소가 있었다. 평균 한 위안소에 7~10명의 위안부가 있었다. 이 위안소들은 섬의 53개 행정구역 가운데 31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전체적인 숫자를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위안부들은 한국 사람이거나 오키나와 사람이었다. 최소한 47개 위안소의 경우 민간인의 집을 징발하거나 심지어는 가족들을 외양간이나 헛간으로 몰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위안소들은 호텔이나 공공건물을 사용했으며 특별히 새로 지은 건물도 있었다. 어떤 노인들은 어린 학생이었을 때 위안부들을 보고 ‘조센삐'라고 놀리며 돌을 던지기도 했다며 회한에 젖기도 했다. 나하시 의원 타까자또가 나하의 두툼한 시사(市史)에 위안부나 징용당한 군대의 잡역부에 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다고 지적하자, 당장 그에 관한 자료를 집어넣겠다는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일본군대의성노예로 끌려간 위안부들』 298쪽 인용)
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은 아시아 여성 10~20만 명을 조직적으로 연행, 납치해서 일본군의 성노예로 만들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씨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임을 밝혔다. 이후 피해자 증언이 필리핀, 대만, 네덜란드 등에서 잇따랐다.
일본군 위안부는 국제인권 무대에서 자주 언급되는 불처벌,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 비인도적 처우에 관한 이슈이다. 유엔 인권이사회를 비롯해 국제노동기구에서 결의하거나 발표되는 보고서에는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가 조사되어 일본의 반인도적인 범죄가 밝혀지기도 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은 일본정부에게 △일본군의 위안부 범죄 인정 △진상규명 △국회결의사죄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이중 일본 정부가 이행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1988년부터 정대협을 비롯해 한국정신대문제연구소 연구원들이 오키나와를 방문해 위안소가 있었던 곳을 찾아내기도 하는 등 힘겨운 조사활동이 이어졌다. 그 외 1990년대 초 도까시끼 섬에 일본군 위안부 배봉기 씨를 기리는 아리랑 비가 주민들의 모금으로 만들어졌으며, 2008년 9월 7일 미야코지마 섬에 정대협은 일본군 위안부 추모비인 ‘아리랑 비’도 건립했다. 일본이나 한국 정부가 만들어 놓은 위령비나 비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하지만 죽어간 넋들은 안식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미리 알았다면, 바쁜 일정을 어떻게든 쪼개서 갔을텐데……. 술 한잔이라도 올렸을 텐데 부질없는 후회가 밀려온다.
식민의 역사와 현재를 공유하는 오키나와와 한국
나하의 시의원 타까자됴 씨는 오키나와가 일본 영토이기는 하지만 일본 국가보다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두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 하나는 오키나와주민들이 일본인들보다 열등하다고 경멸받는 점이고, 또 하나는 참혹한 전쟁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도쿄 하숙집들은 한국인과 류우뀨우 열도 출신은 받지 않는다는 게시문을 붙인다는 것이다. (『일본군대의성노예로 끌려간 위안부들』 298쪽 인용)
오키나와에서 식민의 역사는 ‘현재형’이다. 미군 군사기지의 존재가 그것을 말해준다. 오키나와의 역사를 4백년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이 오키나와 류슈왕국을 침략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된 지 6년이 흐른 1609년 사츠마 군 3천여 명은 오키나와 섬으로 들이닥쳤다. 모든 식민의 역사가 그렇듯이 군사적인 침략 다음에는 경제적인 착취가 이루어진다. 일본 본토 역시 오키나와를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 수탈해갔다. 또 다른 한편 오키나와 류슈왕국은 일본 본토에 침략당하기 전 주변에 있는 미야코지마 섬 등도 지배했는데, 마치 식민의 사슬을 보는 것 같다.
오키나와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서 만난 활동가들은 자신을 일본 사람이 아닌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오키나와는 일본어와 다른 오키나와 언어가 있다. 한국인 참가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한 타마요세 아키라 씨는 오키나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반면 미야코지마섬 출신인 도미야마 마사히로 씨는 자신의 고향 말을 알지 못해 매우 큰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한국인 참가자들을 안내해준 사람들 중 오키나와 사람들도 있지만 일본 본토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일본이 오키나와를 침략하고 미군기지가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과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한국의 운동세력에게 친밀함을 느끼는 것은 일본과 미국의 식민지 경험에서 온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해본다.
과거 식민지라는 개념은 나라와 나라 간에 서로 지배와 종속을 의미했다. 두 차례 큰 전쟁을 끝내고 인류는 식민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듯 했지만 2009년 현재 식민지의 역사는 지금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에게도 현재형이다. 국민이 촛불만 들면 무서워서 믿을 것은 경찰과 검찰밖에 없음을 알고 다수 국민의 생활을 ‘식민상태’로 만든 대통령과 집권당을 보면 된다. 용산 4구역에서 죽어간 철거민과 그 가족들을 식민지로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을 쫓아내고 죽여서 개발에 따른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되는 의료급여마저 거두어 돈 없으면 죽으라는 사람들을 기억하면 된다.
한국으로 돌아와 입국심사를 받는 도중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나에게 한마디 던진다.
“주민등록증 갱신을 하지 않았네요.”
오키나와에 입국할 때 외국인 지문을 채취하면서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한국 공무원에게 한마디 듣고 나니 아! 비로소 한국 땅에 발 딛고 있음을 실감하면서 인천공항을 빠져나왔다.
* 사진은 이은진, 박경수, 재양, 딸기 님이 제공해주셨습니다.
덧붙임
최은아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