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전환도 할 겸 지저분한 머리도 정리해 볼 겸 사무실 옆에 새로 문을 연 미장원에 갔다. "곱슬머리에 숱도 엄청 많네요" 머리카락에 대한 품평을 한바탕 한 후 헤어디자이너는 마치 영화 '가위손'의 조니 뎁처럼 요란한 '가위 놀림'으로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머리는 새로운 스타일로 바뀌었다. 돈을 지불하고 나오려고 하자 헤어디자이너는 적립금이 쌓이면 공짜로 머리손질을 할 수 있다며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적어달란다. 평소에도 공짜를 좋아하던 나는 이 정도쯤이야 생각하며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종이에 적어 건넸다. "적립카드는 언제 주시나요?" 그러자 헤어디자이너는 의가양양하게 말한다. "카드는 분실도 심하고, 누가 주워서 대신 쓸 수도 있고 해서…저희 가게는 지문 인식기를 들여올 거예요"
최근 들어 은행이나 공공도서관 등 생활 곳곳에서 '신분 인증' 수단으로 생체정보를 사용하는 예가 늘어나고 있다. 열쇠나 카드 등을 챙기지 않아도 되고,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는 이유로 인권 침해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생체정보 이용이 생활 깊숙이 침투해 있다. 그리고 이제는 상거래에서조차 생체정보를 이용해 '나'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 되고 있다.
생체정보를 활용하려는 자들은 오히려 첨단화된 시스템을 통해 개인정보를 보호할 수 있다고 사탕발림을 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그리고 영구 불변한 생체정보를 이용해 개인정보를 보호하겠다는 발상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개인간의 거래는 '상대방의 동의'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한번 등록된 생체정보가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거나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민감한 생체정보의 수집은 새로운 범죄와 그에 의한 피해를 예고하는 것과 같다. SF 영화에서처럼 생체인식을 통한 신분 증명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일어날 법한 범죄가 내일 당장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물론 유쾌하게 지문을 찍어주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생체정보의 제공 여부를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국가나 기업은 물론 개인간의 거래에 대해서도 생체정보 사용에 대한 제재가 필요하다. 특히 신기술이 도입될 때에는 인권 침해 우려를 먼저 검토하고, 그럴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는 사용 자체를 막아야 한다.
방긋 웃으며 "다음에 또 오세요"라고 친절하게 인사하는 헤어디자이너에게 아무런 말도 못해주고 나온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내일은 다시 한번 찾아가서 생체정보 수집의 위험성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해봐야겠다.
- 2703호
- 김영원
- 2004-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