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간단했다. 지난 2일 고려대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려던 삼성 이건희 회장은 학생들의 저지로 겨우 학위수여식을 마치고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사태는 놀라웠다. 총장의 사과문과 처장단의 이례적인 사퇴서 제출, 학생들의 ‘철없는 행동’에 대한 비난. 이 사건에 대한 한국사회의 반응은 ‘삼성공화국’의 거대한 힘을 여실히 보여줬다.
400억 기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명예박사학위를 건네는 대학과 “노조가 없다고 해서 문제되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장관, “지성인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예의가 없”다고 다그치는 언론 덕분에 이건희 회장은 자신의 “부덕의 소치”며 “젊은 사람들의 열정으로 이해”한다는 ‘너그러움’까지 보일 수 있었다. 삼성노동자들이 당해온 인권 탄압의 진실은 또 한번 잊혀졌다.
그동안 삼성의 노동탄압은 간간히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그러나 삼성을 고발하는 목소리는 이내 잊혀져 이건희 회장의 얼굴에는 여유만만한 웃음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얼마 전 휴대폰 불법 위치추적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삼성은 검찰의 기소중지로 사실상 면죄부를 부여받았고, 그렇게 삼성의 ‘세련된 비열함’은 진실 저 너머로 사라졌다.
9일, 고려대 사태를 계기로 삼성노동자들과 인권단체들이 ‘삼성노동자 인권침해 사례 발표대회’를 열었으나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 이날 참석한 삼성의 해고노동자들은 미행감시, 강제사직, 가족협박, 회유와 매수는 기본이고 납치, 감금, 폭행까지 시도하는 삼성 노동자관리의 실상을 전했다. SDI 수원공장에 근무하던 박경렬 씨는 삼성의 납치와 협박을 참을 수 없어 자해까지 시도했다고 한다. 같은 공장에서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준비하다 결국 해고된 김갑수 씨는 “현장에서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주기를 바란다”며 오히려 현장의 동료들을 걱정했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써준 고려대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전한 삼성 해고노동자들은 “박사학위보다 중요한 것이 노동자들의 미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알아서 모시는’ 사람들 덕분에 삼성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은 난망해 보인다. 그래서 ‘삼성 노동탄압 분쇄와 대책을 위한 경기지역 공동대책위원회’는 3sung.org를 통해 직접 “삼성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겠다고 나섰다. ‘삼성 제자리 찾아주기 운동’이 그것.
‘대한민국은 삼성공화국’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농담은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단면이다. 이건희 회장이 겸손한 듯 ‘부덕의 소치’를 거론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탄압에 눈을 돌리고 입을 다물어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성노동자의 고통스런 기억을 더 이상 혼자만의 것으로 묻어두지 않겠다는 삼성 해고노동자들과 인권사회단체들의 목소리는 삼성공화국 시대의 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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