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거리 집회에 나왔으면 찍히겠다는 각오하고 나온 것 아닙니까? 이건 취재의 자유를 가로막는 겁니다.”
지난 7일 광화문에서 열린 학생 자살 관련 촛불문화제에서는 몰려든 취재진과 행사 참여자들 사이에 말다툼이 오고갔다. 며칠 전 교육당국이 학생들의 ‘집단행동’을 막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개별 학교 차원에서도 참가자 징계를 운운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얼굴이 언론을 통해 공개될까 꺼리거나 두려워한 학생들이 많았다. 취재 카메라들이 행사장 주변을 꽉 채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행사장 안으로조차 들어오지 못하고 주위를 배회하는 학생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에 주최측 자원활동가들은 카메라가 학생들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찍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고, 직접 얼굴 촬영을 하지 말라고 요구한 학생들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취재진들은 ‘찍더라도 데스크에서 내보내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 ‘취재의 자유를 가로막는 거냐’, ‘이런 데 나왔으면 찍힐 각오를 하고 나온 것 아니냐’, ‘행사 알려주는 것만 해도 어디인데 찍어라 마라 간섭이냐’며 언성을 높였다. 학생들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카메라를 들이대는 횡포도 있었다.
물론 이런 사태가 불거진 근본적인 책임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올 수 있는 자유, 함께 모여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가로막는 데만 급급한 교육당국과 학교에 있다. 징계위협만 없었다면 학생들이 카메라를 두려워할 이유도, ‘모자이크’ 뒤에 숨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분명 징계의 위협이 있는 상태였고, 학생들이 카메라를 두려워해 참여를 꺼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메라의 취재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했을까. ‘카메라의 자유’와 ‘촬영 대상의 인권’이 충돌했을 때 어떤 기준을 따르는 것이 과연 옳을까.
진실의 카메라, 폭력의 카메라
사진이나 영상은 언론보도에서 단지 부수적 장치가 아니다.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나 영상이 글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줄 때가 있다. 오랜 가뭄 끝 갈라진 논바닥처럼 주름진 농부의 얼굴은 농촌의 아득한 현실을 백 마디 말이나 글보다 더 설득력있게 전한다. 반대로 사진이나 영상이 실제보다 더 많은 것 혹은 실제와는 다른 것을 말함으로써 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경찰서에 잡혀온 피의자들의 등짝에 그려져 있는 문신을 비춘 카메라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를 범죄자로 확신하게 만들어 유죄추정 수사와 유죄 판결을 유도한다. 이 때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받을 피의자의 인권은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셈이다. 또 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었더라도 보도로 인해 또 다른 피해를 낳게 되는 경우도 있다. 만약 성폭력을 당한 뒤 도망쳐 나온 피해여성의 얼굴이나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을 개연성이 있는 실종사건 피해자의 얼굴을 찍거나 그대로 보도했다면 이는 그 여성에 대한 심각한 인권침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켜는 그 찰나의 순간, 그리고 그렇게 찍힌 사진이나 영상을 게재할 때에는 아주 세심한 ‘인권감수성’이 요구된다. 특히 오늘날처럼 사진·영상자료가 디지털화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무단 전송, 복제, 변조까지 쉬워진 만큼 더욱 각별한 주의가 요청된다.
카메라 촬영과 촬영된 사진·영상의 게재와 관련해 언론이 지켜야 할 지침을 명확하게 정리해 놓은 일반적 인권기준은 찾아보기 힘들다. 장호순 교수(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는 “일반적으로 본인의 동의를 받으면 촬영이 가능하다. 본인의 동의를 받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공인이냐 사인이냐, 촬영 장소가 공개된 장소냐 사적인 장소냐, 사안이 공공의 이해와 관련된 사안이냐 아니냐에 따라 촬영이 가능한지 여부가 달라진다. 촬영 이후에도 만약 사진이나 영상이 나갔을 때 인권을 침해할 명백한 위험이 있음을 알면서도 보도했다면 이는 법적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처럼 언론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취재 대상의 인권을 보호하려면 상황에 따라 달리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런 해석에 비추어볼 때, ‘카메라의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당사자의 명시적 혹은 묵시적 동의가 존재하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기준에 따르더라도 좀더 따져보아야 할 미묘한 지점들이 여전히 남는다.
소수자들의 입장에 선 카메라
무엇보다 7일 행사와 같이, 카메라 취재가 허용된다고 암묵적으로 전제된 장소에서는 모든 촬영이 허용되는가가 문제가 된다. 공개된 공공장소에서 행사가 열렸다면 주최측의 다른 지침이 없는 한 일반적으로 카메라 취재가 암묵적으로 허용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행사에 참여하는 이들이 얼굴이 노출될 경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교육당국이나 학교가 금지한 행사에 참가한 청소년, 퀴어 퍼레이드에 나선 성적소수자 등이 예가 될 수 있다.
행사 주최측이나 참가자들은 열띤 취재로 행사의 취지가 가급적 널리 알려지기를 원할 것이다. 또 무대에 오르는 이들이나 대열의 맨 앞에 선 사람들은 얼굴 노출을 이미 각오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지만 모든 참가자가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얼굴을 가리거나 특별한 분장을 하지 않았더라도 취재 카메라에 노출되는 것은 꺼릴 수 있다. 물론 소수자들이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용기있게 사회적 발언에 나서는 것은 독려되어야 할 일이지만 이를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해 현장은 맘껏 촬영하게 하고 어떤 사진이나 영상을 내보낼지 편집하는 과정에서 소수자들의 입장을 고려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얼굴이 공개될 경우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소수자들의 얼굴이 함부로 공개된 사례들이 이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언론의 편집과정만을 믿고 얼굴을 내맡기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일반 참가자들에 대한 근접 촬영은 행사 참여를 주저하게 만드는 위축 효과를 낳는다.
따라서 공개 행사에서는 의사를 확인할 필요 없이 아무나 찍어도 되고 어떻게 찍든 그것은 카메라의 몫이라는 자만을 버려야 한다. 용기있게 참석한 이들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박수, 혹 카메라가 위협적인 무기가 되지는 않는가 하는 자기 성찰, 소수자들이 겪어왔던 혹은 겪게 될 고통에 대한 공감이 없는 카메라는 언제든 폭력이 될 수 있다. 행사의 개최 취지나 현장 상황을 최대한 진실을 담아 전하되,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사진·영상으로 참가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공개된 장소라고 하더라도 그 공개가 누구에 의한 결정인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초·중등학교 교실을 찾아간 카메라, 교회나 단체가 주최한 청소년행사를 찾아간 카메라의 경우, 일반적으로 학교장이나 단체장만의 승인을 받을 뿐 실제로 찍히는 학생·청소년의 의사를 직접 묻지는 않는다. 난데없이 찾아온 카메라 앞에 꼼짝없이 포로 신세에 놓이는 경우는 없는지 결정의 주체에 대해서도 민감해져야 한다.
피해자의 고통에 연대하는 카메라
다음으로 당사자의 의사를 일일이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재난이나 폭력의 피해자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재난 상황이나 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폭력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피해자의 얼굴을 그대로 노출한다거나 피해 상황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일은 언론에 의한 2차, 3차 피해를 낳을 수 있다.
우리 언론은 특히나 재난과 폭력의 피해자를 한낱 구경거리로 전시하는 행위에 익숙해 있다. 그 피해자가 어린이, 이미 죽은 사람, 제3세계의 힘없는 사람들, 포로 등 언론에 대해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힘든 처지에 놓인 사람들일 경우 그런 일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난다.
최근 대구의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간호조무사가 신생아를 학대한 사진을 재미삼아 인터넷에 올려 문제가 되었는데, 이 사건을 다룬 언론들은 거의 예외없이 학대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보도했다. 지난해에는 미군에 의한 이라크 포로 학대 사진이 즐비하게 전시됐고, 인도네시아 반다 아체의 잔혹한 학살 피해자 사진들이 언론에 대문짝하게 실린 일도 있었다. 얼마 전 동남아시아를 휩쓴 지진해일에 순식간에 휩싸인 피해자들의 모습, 살려달라고 외치는 김선일 씨의 참수 직전 모습, 미 무역센터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모습, 화재가 난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몇 차례씩 방영되어도 무감각해지도록 언론은 독자나 시청자를 길들이고 있다.
여기에는 피해 상황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이 피해자와 가족․친지들의 고통에 대한 배려, 살았든 죽었든 그들이 겪어야 했을 모멸감에 대한 공감이 없다. 아무리 문제의 심각성을 전하고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합리화하더라도, 타인의 고통에 연대하지 않는 카메라나 언론은 타인의 존엄성을 팔아 자기 잇속을 채운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이처럼 카메라의 자유, 언론 보도의 자유는 취재 대상의 인권 보호 원칙에 보다 충실해질 필요가 있다. 권력자들의 비리나 폭력을 밝혀내기 위해 들이대는 카메라는 더욱 과감해져야 하지만, 소수자나 피해자의 고통 앞에 선 카메라는 오만을 버려야 한다. ‘좋은’ 보도 사진영상을 판단하는 기준, 진실에 밀착해 들어가는 훌륭한 취재기자를 평가하는 기준에 인권감수성이 중요한 잣대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