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이란 국내법적 효력을 가지는 난민협약 상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를 지닌 자이다. 그동안 난민인정에 소극적이고 지극히 형식적인 난민인정절차로 비판받아오던 법무부는 올해 초부터 난민인정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개선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수년 동안 난민지원 시민사회단체나 학계에서 개선방안으로 제시되어 온 내용의 상당 부분을 수용할 뜻을 내비치고 있다. 예컨대, 난민전담기구로서 출입국관리국 내의 '국적난민과'의 설치와 전문 인력 보강, 난민에 대한 직업 상담과 직업 훈련 등을 위한 난민구호시설의 설치, 전문가로 구성된 난민법제개정연구위원회를 통한 난민인정절차의 재정비, 난민신청자에 대한 정당한 체류자격의 부여 등의 법제화 등 독립된 난민법의 제정이라는 요구 외에는 그동안 제시되었던 정책제안과 그 내용이 흡사해 보인다. 그런데 왜 나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가.
법무부는 선진국의 난민인정심사의 강화도 난민제도를 악용하는 외국인들 때문이고, 과거 우리가 난민을 적극적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경위도 불법체류자들이 장기체류의 방편으로 난민인정제도를 악용하는 경향 때문이었으며, 난민인정 문제에 관하여 항상 고려대상이 되어야 하는 첫 번째도 불법체류자들의 악용가능성이고, '동정여론'을 타고 있는 최근 사례도 취업을 위한 불법체류 중 단속활동이 강화되자 난민인정신청을 한 것이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난민신청자들이 급증한 것은 난민신청제도가 악용되고 있는 증거라고까지 주장한다. 모든 권리는 악용가능하다. 한국정부의 난민정책의 출발점은 그 보장된 권리의 악용가능성에 대한 통제인가. 그렇다면 헌법실현의 출발점은 기본권의 악용가능성에 대한 통제가 되어야 하는가. 정책의 부재와 인권적 접근의 부재,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능력과 의지의 부재, 이것이 이러저러한 제도개선 논의의 근저에 흐르고 있는 한국 난민문제의 현주소이다.
어떠한 행정절차가 최소한의 존재의의를 가지고 최소한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그 투명성의 확보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법무부는 '난민신청의 절차, 난민인정 심사 중인 자에 대한 처우, 난민으로 인정한 외국인에 대한 처우, 이의신청 절차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난민인정업무처리지침'을 '테러 등 불순 외국인의 난민신청제도 악용 가능성'과 '지침 전체를 공개하지는 않는 국제관례에 비추어 공개할 경우 비공개국가와의 외교적 마찰 가능성'을 들어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또한 위 지침이 '난민인정을 불허한 외국인 및 난민인정을 취소한 외국인에 대한 출국조치 등 규제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면서 '난민인정 불허자와 취소자의 악용 가능성'을 근거로 위 지침을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난민의 권리와 관련된 핵심적인 절차와 기준이 아무런 법적 구속력을 가지지 아니하고 따라서 법적 통제가 거의 불가능하며 특별한 절차 없이 장관이 그 내용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훈령 또는 예규의 형식으로 규정되어 있는 점도 부당하지만, 어떤 권리의 악용가능성을 이유로 그 권리의 신청과 불복, 관련된 다른 권리의 제한 등에 관한 구체적인 절차와 기준을 공개할 수 없다는 주장은 기본권과 형사절차상의 권리의 악용가능성을 이유로 헌법과 형사소송법을 공개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법무부의 제도개선은 그동안의 문제점들을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어야 한다. 법령과 기구가 바뀌게 된다면 신청자에게는 공개하지 않는 면담자료와 그것에 근거한 실무자의 의견이 결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바뀔 수 있는 것인가. 특히 실무협의회의 경우 회의가 열리지 않고 서면심리로 대체되었을 때, 위원들은 가부판단만을 법무부에 통지할 뿐 위원들조차도 난민인정이나 불허처분의 사유를 알 수 없었던 상황들에 대하여는 충분한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인정협의회의 경우에도 결국 실무자의 의견에 거의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고 충분한 심사의 시간이 확보되지도 않는 상황에서 난민협약이나 그 유권해석의 내용을 잘 몰라도 위원으로 활동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현 구조의 극복은 독립성의 강화와 인적 구성의 변화만으로 가능한 것인가. 행정절차법상 행정청은 처분을 하는 때에는 당사자에게 그 '근거와 이유'를 제시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무부는 줄곧 난민협약 제1조의 난민의 정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만을 불허사유로서 밝히고 있어 어떤 점에 대해서 이의 혹은 소송을 제기하여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은 바뀔 가능성이 있는가. 특히 당사자들에게는 절대 밝히지 않던 구체적인 불허사유를 일부 언론 보도나 대외적 발표문 등에서 일관성 없이 밝히는 상황은 과연 극복 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문제의 실체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국민을 속이는 그들만의 말잔치에 나는 동참할 수 없다.
내가 접했던 난민신청자들은 다양하다.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박해, 소수민족으로서의 박해, 종교적 박해, 그리고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박해 등등. 난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나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민주화운동도 그들의 종교적 견해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들에게 '박해의 공포'가 있느냐만이 문제될 뿐이다. 그렇게 접근할 때만이 난민의 존재의의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실질적 법적 절차의 확립과 정비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권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이지만, 법과 제도는 비록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투쟁의 결과를 사회 속에 내면화시키는 기능 역시 수행하기 때문이다. 돌아갈 수 없기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머물 수 없다고 말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덧붙임
황필규 님은 아름다운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변호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