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호주제 폐지 이후 호적법 개선방안으로 '목적별 신분등록제'를 도입하기 위해 활동 중인 '목적별신분등록법제정을위한공동행동'은 우리 사회에서 만연한 개인 가족정보 수집 관행을 지적하기 위해 기업의 입사지원서 양식을 분석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호적제도에 따른 피해 사례 중에서, 구직자가 자신의 가족 사항을 이유로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부모님이 뭐하는 분인지 결혼을 했는지 안했는지가 한 사람의 채용여부를 결정짓는 근거가 된다는 것은 낡은 가족주의의 폐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래서 공동행동은 목적별 신분등록제의 장점도 알릴 겸 호주제 폐지 이후 없어져야 할 대표적인 악습을 지적하기 위해 무려 300여개 기업의 입사지원서를 홈페이지를 통해 입수하고 분석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리 어렵지 않은 작업이라 생각했고, 과연 예상했던 결과가 나올까하는 호기심에 들떠 며칠동안 이 기업 저 기업 홈페이지 채용 정보를 찾아 헤매던 나는 의외로 금방 지쳐버리고 말았다. 갈수록 심해지는 짜증을 참기 어려워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 이유는 입사지원서 양식을 직접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기만 하려고 해도, 그 기업 홈페이지의 회원이 되어야 하거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어 '인증'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몇 군데는 내가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한 '대가(?)를 치룬다' 생각하며 넘어갔지만, 그렇게 수십 곳의 기업에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넘겨주자니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구인기업과 구직자의 관계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구직자는 취업을 위해서라면 구인기업이 요구하는 모든 정보를 제공한 후 자신이 취사선택되기만을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 우리나라의 상당수 기업은 이런 권력을 바탕으로 구직자의 이혼문제를 걸고 넘어지고, 부모의 직업을 형제들의 학력을 캐묻는다. 채용이 되든 안 되든 한번이라도 회사에 취업을 해볼까 고민했던 사람들의 주민등록번호까지 입수해 둔다.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보관되고 활용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정보가 권력이 되는 사회에서 수많은 구직자들이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개인 정보들은 기업의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어떤 방식으로든 이용되고 있으리라 추측해볼 뿐이다.
채용 과정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구직자가 자신의 주민번호 제공을 거부하는 것은 다른 낡은 관행이 개선된다 하더라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주민번호라는, 많은 개인 정보를 담고 있는 식별 코드 자체를 하루 빨리 없애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도 취직을 위해 불쾌감을 무릅쓰고 입사지원서를 쓰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대변하여 이런 관행을 끈질기게 문제 삼는 활동이 필요하다.
덧붙임
김원정 님은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