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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박석진의 인권이야기] 행복한 인권활동가를 꿈꾸며

'와이키키 브라더스'라는 영화를 본 적 있는지? 제목만 듣고선 햇빛 화창한 날 옥색 바다, 눈같이 흰 와이키키 해변 따위를 떠올릴 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세 친구'라는 사회성 짙은 영화로 유명해진 임순례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나는 서울 어느 변두리 극장의 어둠 속 한 모퉁이에서 심란한 마음으로 이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영화 보는 내내 어느 대목에서 웃어야 할지 또 어느 대목에서 울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다가 끝내 가슴에 비수가 꽂혔다.

"너 지금 행복하니?" 음악이 전부이던 고등학생 시절 함께 '밴드 활동'을 하다가 성인이 된 후 음악을 포기한 한 친구가, 여전히 어렵게 음악을 하고 있던 주인공에게 물었다. 너, 지금 행복하니? 머리 속이 헝클어졌다. 나, 지금 행복한가?

"당신들이 여기 와서 노숙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 것 같아? 당신들이 이 사람들(노숙인들) 책임질 수 있어?" 눈을 부라리고 손까지 휘두르며 쏟아내는 말들에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서울역 광장에서 진행했던 인권영화 정기상영회 '반딧불' 행사는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인권운동이 할 수 있는 게 뭘까? 당시 반딧불에서는 살 집이 없는 사람들이 빈집을 점거해 대안적 주거 공간으로 삼는다는 내용의 <점거하라>는 영화를 상영했다. '살 집'으로 대변되는 주거권도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당연한 인권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주거권의 최대 박탈자'인 노숙인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거부했다. 우리가 '피해 당사자'라고 부르는 그들은. "당신들이 뭘 안다고 그래? 당신 여기 와서 노숙생활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어?" 난 우물우물 말을 내뱉는 건지 삼키는 건지 제대로 분간도 하지 못한 채 자꾸 고개만 떨어뜨렸다. 어차피 내가 노숙인도 아닌데 내가 하는 일이 저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데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까? 내가 노숙인이 되어야 하는 건가?

"신분증 압수는 불법입니다. 돌려주십시오" "당신들 어느 나라 사람이야?" 그 순간 차라리 내가 '한국인'이 아니기를 바랬다. 내가 보는 눈앞에서도 이주노동자에게 온갖 욕설과 협박을 하던 그. 내가 그와 같은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그 이주노동자에게 미안했다. 신분증을 압수하는 건 분명히 불법이지만 많은 '사장'들은 이주노동자들을 '묶어 두기' 위해 신분증을 압수한다. 태국에서 온 그 이주노동자는 일하던 작업장에서 더 이상 일을 못하겠다며, 차라리 '불법체류자'가 되겠다며 신분증을 돌려 받고 싶어했다. 하지만 '사장'은 신분증 내주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또 한 명의 '불법체류자'를 만드는 상황이었지만 신분증을 대신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인 그 이주노동자의 눈빛은 너무나도 간절했다. 차라리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법체류자'를 선택해야 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인권 현실. 그의 절박한 눈빛에 세상은 절망만 가득할 뿐이다. 그런데도 그와 함께 하고자 하는 나와 그 사이에는 심연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어쨌든 난 여기서 '한국인'이라는 거대한 '특권'을 가진 기득권 집단의 한 구성원일 뿐이다. 어떤 순간 난 그들과 함께 하겠지만 결국 내가 '그들'이 될 수는 없다. 내가 그들의 삶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권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금, 행복한가, 라는 질문에 가끔 머리 속이 또다시 헝클어진다. '인권은 천부적인 것으로서 누구나 나면서부터 인권을 갖고 있다'는 말은 '거짓'일 정도로 우리 주변엔 기본적인 인권조차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나 또한 어떤 점에 있어서는 인권침해 당사자이긴 하지만 결국 어쩌면 난 '그들'이 될 수는 없다. 내가 함께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을 내가 이해한다고 말할 수조차 있을까. '인권침해 해결사'를 자처하며 침해 당사자들의 대리인이 되는 것이 인권운동의 목표가 아니라면 당사자들과 인권운동이 함께 하는 방식은 어떠해야 할까. 지금 인권운동은 낮은 곳을 향하고 있는가. 자신할 수는 없지만, 내가 '그들'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말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인권을 박탈당한 사람들 옆에서 그들과 함께 하는 인권운동이라면, 내가 언젠가 그렇게 하고 있다면, 나, 행복하다고 수줍게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

[알림] 이번주부터 인권이야기 필진이 새롭게 바뀝니다.

박석진(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윤한기(에이즈인권모임 나누리+ 대표)
전소희(자유무역협정·WTO반대 국민행동 사무처장) 김도현(동국대 법학교수)
덧붙임

박석진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