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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강제징집, 전두환이 직접지시"

국방부 과거사위 중간발표…녹화사업 대상자 1100명 넘어

1980년대 초반 시위현장에서 잡힌 대학생을 곧바로 강제입영시킨 강제징집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의 직접지시에 따라 자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대상자가 그동안 알려졌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지난 5월 27일 민간위원 7명과 국방부 내부위원 5명으로 발족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 아래 과거사위)가 보안사 1차자료를 확보해 검토한 결과 밝혀졌다. 과거사위는 지난해 11월 기무사에 구성된 '녹화사업 진상규명 T/F'가 기무사의 모든 존안자료를 검색해 찾아낸 강제징집 23건(120여매), 녹화사업 136건(11만4천여매) 등 관련자료를 모두 넘겨받고 다른 기관의 자료까지 추가 확보해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19일 과거사위 조사현황 중간발표에 따르면, 전두환은 1981년 4월 2일 '소요관련 학생들을 전방부대에 입영 조치하라'고 국방장관에게 구두지시했고 국방부장관은 이를 메모해 국방차관을 거쳐 병무청장에게 전달했다. 같은해 12월 1일 국방부에서는 '소요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을 마련해 같은달 3일 청와대에 구두보고했으며 5일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이 합의서를 작성했다. 1983년 12월 16일에는 국방장관이 병역면탈 목적으로 학원소요를 기도하는 사례가 나타난다며 대통령에게 '학원소요 등 수형자 병역처리 방안'을 보고하면서 '순화가능자는 입영조치'토록 건의하기도 했다.

이미 1980년 9월 4일 계엄하 포고령 위반자 64명을 동시입영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휴학 및 제적자들을 일괄 조기 입영시키는 등 넓은 의미의 강제징집을 자행해오던 전두환정권은 이 방침에 따라 '소요사태 현장에서의 검거' 등 사유발생과 동시에 관계기관에서 학생을 군부대로 직접 인계하는 강제징집을 제도화했다.

과거사위는 강제징집이 내무부·문교부·국방부와 각 대학 등 관계기관의 총체적인 대처로 단행됐다고 밝혔다. 내무부(경찰)가 학원소요 관련자로 결정한 전원에 대해 각 대학은 '지도휴학제'에 따라 학적변동 처리했고 문교부는 '학원정책심의관실'을 확대개편해 대학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했다. 국방부(병무청)에서는 신체조건과 신체검사 절차를 무시하고 이들을 징집했고 군은 이들을 '특수학적변동자'로 별도 관리하며 '우리 안보현실을 체험토록 한다'는 명목으로 입대자의 적성·특기와 무관하게 최전방에 우선배치했다. 이들의 병적기록부 상단에는 '특수지원'이나 '특수학변'이란 적색고무인을 날인해 신상관리했다.


보안사 1차자료로 녹화사업 실상 확인

보안사는 강제징집자 증가로 인한 군내 좌경사조 확산과 일선 지휘관들의 지휘 부담 등을 이유로 1982년 5월 17일 '좌경 의식화 활동 지침'을 마련했고 같은해 9월 6일에는 '전담공작과'(이후 심사과로 호칭)를 신설했다. 심사과 신설 이후 보안사는 강제징집된 인원을 대상으로 '좌경오염 방지', '학원소요의 원천 억제' 등의 명목 하에 '특수학적변동자'를 개별심사를 통해 순화하고 그 상당수를 이념서클 적발 및 지하 연계조직을 색출하는 데 활용하는 녹화사업을 체계적으로 전개했다고 과거사위는 밝혔다. 녹화사업 이전에는 강제징집 병사를 A·B·C등급으로 구분해 동향관찰만 실시했다.

보안사가 1982년 11월 17일 작성한 '특수학변자 심사 및 순화계획 보고'에 따르면 △당시까지 강제징집되어 복무중인 병사 595명 전원을 대상으로 1년간에 걸쳐 심사·순화교육을 실시하고 △의식화 써클 및 소요관련 활동사항, 조직체계 및 접촉인물, 입대 후 의식화 활동 여부 등을 심사하며 △이를 위해 심사담당 부대원 49명을 2차에 걸쳐 보안사로 소집해 심사·순화교육 요령, 협조자 또는 침투망으로 활용하는 방법 등을 교육하도록 했다.

심사기간은 통상 1명당 1주일이었고 서울소재 주요대학의 A급 대상자들은 보안사 심사과에서 직접 심사하고 여타 인원은 예하 보안부대에서 담당했다. 보안사 심사과는 을지로 3가 소재 아파트를 심사장소로 사용하다 1983년 5월부터는 과천소재 아파트 2채를 매입해 활용했다. 1983년부터는 배경지식이 구비된 고시출신 및 사회과학 전공자 등 전문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각 군에 복무중인 단기장교 23명을 차출해 '심사장교' 임무를 부여하기도 했다. 보안사는 심사결과 '순화'되었다고 판단된 병사들에게 학원동향 수집임무, 이른바 '프락치'를 강요했다고 과거사위는 밝혔다. 결국 녹화사업은 6명이 의문사하고 재야와 야권에서 문제제기하며 정치쟁점화하자 1984년 12월 19일 심사과 해체와 함께 폐지됐다.

이후 과거사위는 녹화사업 대상자를 관리했던 1개 사단을 모델로 해 사업의 실제 운용과정 및 실태 등을 집중 조명할 예정이다. 또 △피해자 명예회복과 보상대책 △가해자·피해자 화해조처 방안 △재발 방지 대책 등에 대해 연구할 계획이다.


녹화사업 대상자 1200여명 추산

녹화사업 대상자 수는 그동안 265명 정도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과거사위는 강제징집 인원 가운데 경미한 사건 관련자와 조기 전역자 등을 제외한 '특수학적변동자' 900여명과 정상입대자 300여명 등 1200여명으로 추산되며 이들 중 상당수가 '프락치'로 정보수집에 활용됐다가 과거사위는 밝혔다.

한편 과거사위는 전체 강제징집자 수를 특정하기 위해 추가조사 활동을 전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과거사위는 녹화사업 추진을 위해 1982년 9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보안사에서 작성한 1121명의 '특수학변자 명단'을 입수했지만 여기에는 1982년 9월 녹화사업 실시 이전에 전역한 인원이 누락되어 있다. 과거사위는 전체 강제징집자의 명단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의 조사결과 잠정집계된 강제징집 인원만 1100여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그동안 정부는 국회 대정부질의와 1988년 5공비리 청문회 등에서 강제징집 인원이 447명이고 이 가운데 265명이 녹화사업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어 잠정집계 결과와도 큰 차이가 난다.

과거사위는 "녹화사업은 그동안 언론보도 등을 통해 많이 알려진 것이 사실이나, 증거자료 부족 등으로 명확한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우리 위원회에서 처음으로 당시 보안사의 1차자료를 대부분 확인하였다는 점은 진상규명에 있어 중대한 진전"이라고 자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