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이태원참사에 관해 공개 사과를 했다고 한다. “지켜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 “너무나 비통하고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사과받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8년 전 기억이 떠오를 뿐이다. 당시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께서 겪으신 고통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최종 책임은 저에게” 있다고 했다. 사과와 책임은 면책의 동의어였고 탄압의 계고장이었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보고서를 읽던 중이라 더욱 그랬다. 세월호참사 이후의 시간을 복기하며 괴롭던 때였다. 우리는 세월호참사의 주요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데 실패해왔다. 동시에 사법적 책임 묻기의 한계도 알게 됐다. 한계를 넘어설 방법은 아직 모르겠는데 정치적 책임 묻기는 벌써 실패했다. 박근혜는 파면되어야 하나 생명권 보호 의무를 위반하지는 않았다는 결정으로. 그는 “최종 책임”을 졌을지 모르나 세월호참사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았다. 피해자도 우리도 사과받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의 마음을 알렸을 뿐 누구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은 사과의 출발선일 뿐이다. 책임을 자처할 때 사과가 시작된다. 책임지는 사과는 이미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11월 1일 몇몇 공직자들의 사과가 잇따랐다. 오후에 112신고 녹취록이 공개됐다. 녹취록 공개 후 쏟아질 비난을 피할 속셈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신고 이후 대응이 늦어진 잘못에 자신의 책임을 고백하는 사과는 아니었다. 대통령은 녹취록을 보고받고 격노했다고만 한다. 그는 그날 사과하지 않았다.
재난참사에서 상급자의 책임은 하급자를 잘못 둔 것과 다르다. 재난참사 대응 시스템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든 빠르고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잘못들로 시스템 전체의 작동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건 하급자의 책임에 그치지 않는다. ‘엄정한 문책’이 상급자의 책임 전부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시민의 생명을 구하고 안전을 지킨다는 사명감이 부족했든 실질적으로 대처할 역량이 부족했든 상급자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재난참사와 같이 복합적이고 규모가 큰 사건에서는 자신이 져야 했고 져야 할 책임을 바로 알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진상규명이 중요하다. 무언가 부족했고 잘못이 있어 재난참사가 발생했을 때 그 부족함이나 잘못에 자신의 몫이 있음을 미리 말해야 한다. 자신의 책임을 배우고 익힐 방법으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 그 결과에 따라 자신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피해자에게 고개 숙여 용서를 구할 때 사과도 끝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진상규명은 ‘꼬리 자르기’에 그치고 책임 분배에 실패하고 만다.
세월호참사 책임 묻기의 실패는 처벌의 실패와 다르다. 우리사회가 재난참사의 책임을 나눠지는 방법을 아직 모른다는 것에 가깝다.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미안해한다. 그 마음을 떠나보내지 못한 채 무너지기를 반복한다. 이번에는, 더 큰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 제 몫의 책임을 다하게 해야 한다. 진상규명은 서로를 변화의 주체로, 책임지는 자리로 불러주는 과정이다. 이걸 고마워할 줄 모르고 도망치려는 공직자가 있다면 우리사회가 그에게 내줄 자리는 없다.
“길을 걷다가, 그냥 죽은 거잖아요.” 진상규명은 도대체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해할 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일어나지 않게 했어야 할 책임이 합당하게 분배되지 않으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해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진실과 정의와 회복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믿음이 무너진 자리에 우리가 다음엔 다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세워야 한다.
사과가 사과인, 책임이 책임인 세계를 바라는 게 무모한 욕심일 수는 없다. 8년 전 그랬듯 우리는 함께 하기 위해 책임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피해자와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야 시작되고 있다.
* 경향신문 11월 8일 ‘세상읽기’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