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위에 군림하는 사법의 낡은 벽을 허물고, 국민의 인권을 지켜내지 못한 사법부의 어두운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진정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법원으로 거듭나는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작년 말 법원장들이 일선 재판정에 몰래 들어가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판사가 당사자들을 강압적으로 다루는지 따위를 관찰했다는 후문도 들려오고 있다. 일단 이러한 대법원의 의식전환은 참으로 환영할 일이다. 국가권력의 원천이 국민에게 있다면 그 국가권력의 한 축인 사법부가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원칙을 새삼 확인한 것이리라.
하지만 국민을 섬기는 법원은 밀행감사나 의식변화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조의 문제이고 근원적 제도의 문제이다. 일선 법관들이 아무리 사건당사자를 하늘처럼 받들고자 해도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이를 뒷받침해 주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마치 학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질책하면서도 공부할 여건과 환경을 갖추어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매한가지다.
국민을 섬길 수 있는 구조와 제도란 어떤 것인가? 원리는 간단하다. 법관의 본연의 업무는 재판이므로 법관이 오직 재판에만 충실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면 된다. 법관이 맡은바 사건과 당사자에만 혼신의 힘을 쏟고 다른 일체의 것, 이를테면 승진·보직·퇴직 등 인사문제, 변호사·검사와의 인간적 관계, 상급법원 또는 법관의 정책이나 의중 따위에서 철저히 자유로울 때 국민을 섬기는 법원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사건을 심리할 충분한 시간 여유가 주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입각한 세부적인 사법개혁의 주요쟁점을 이 글에서 다 다룰 수는 없으므로 근본적이고도 핵심적인 한 가지 제안만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그것은 현행 사법시험 및 사법연수원 제도의 폐지다. 국민을 섬기는 사법과 사법시험 및 사법연수원 제도가 무슨 상관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양자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현행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 제도는 법조계와 국민을 확연히 분리하는 높다란 담장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국민 위에 군림하는 사법의 구조적 토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법시험 수험생은 한정된 인원만 선발하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서 벗어나 일약 한국사회의 귀족층으로 신분상승 하게 된다. 또한 사법연수원 2년을 이수하면서 모든 법조인들은 사법연수원 선후배 및 동기로서의 집단적 동질성을 띠게 된다.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 성적이 우수하면 판사·검사로 임관하는데, 대체로 그 성적에 따라 장차 보직과 승진이 결정된다. 즉, 이들은 피라미드형 관료적 법원조직·검찰조직 내에서 기수별·성적순으로 승진해가면서 조직논리에 순치되어 가는 것이다. 대단히 우수한 성적의 지원자는 대개 (판사의 경우) 법원행정처 또는 (검사의 경우) 법무부의 고위직을 거치면서 사법행정 및 법무행정을 장악한다. 이러한 승진과정에서 탈락하거나 승진가망이 별로 없는 판·검사는 퇴직하여 변호사 개업을 하고 이른바 '전관'으로서 특수한 혜택을 누린다. 판·검사들은 다음 인사에서 어디에 발령을 받을까 또는 언제 퇴직하여 개업을 할까에 초미의 관심을 두고 있지 담당사건과 당사자에게 충분한 시간과 정력을 쏟지 못한다. 이렇게 법조삼륜은 현행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이라는 제도를 바탕으로 삼아 그들만의 관료적 통제와 인간적 호의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정원제 사법시험의 폐지는 일정 정도 이상의 자질을 갖춘 지원자는 숫자에 관계없이 누구나 변호사 자격을 획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법연수원 폐지는 판·검사 실무연수를 한울타리 안에 모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직역별로 수행함을 의미한다. 이들 제도의 폐지는 현재까지 소수 특권집단으로 유지되어온 단일한 법조기득권층의 해체를 가져올 것이다. 충분한 수의 변호사들이 광대한 법조인 풀을 형성할 것이고 연수원 졸업자가 아니라 경력변호사들 중에서 법관이 임명될 것이다. 가파른 승진구조도 사라질 것이고, 법관경력 도중에 퇴직하고 개업하여 전관이 되는 사례도 예외가 될 것이다. 법관들은 당사자들에게만 눈을 향한 채 소신 있는 재판을 수행할 것이다. 훗날 이런 날이 온다면 국민을 섬기는 사법은 이미 구호로서의 가치를 상실한지 오래일 것이다.
"국민의 인권을 지키고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법은 한낱 언론의 세례를 받는 몇몇 사건을 무리 없이 처리하고 단기적·지엽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한다고 해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법조계의 저변을 관통하고 있는 구조적 척수에 메스를 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뼈를 깎는 희생을 요구하는 과제이다.
덧붙임
김도현 님은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입니다.